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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최악일지도 몰라

수수께끼 같은 마을 지르갈란, Жыргалан

by 미나리즘

수수께끼 같은 마을, 지르갈란

카라콜에서 악수(Ак-Суу) 반대편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여행자들의 발길이 좀처럼 닿지 않는 작은 산골 마을 하나가 나타난다. 이름부터 낯선 지르갈란(Жыргалан). 읽는 것도, 발음하는 것도 생경하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도시인 카라콜을 기점으로 이동했기에, 우리처럼 ‘악수 온천에서 곧장 넘어가기’를 시도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며칠 동안 인터넷을 샅샅이 뒤졌지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만큼의 정보는 찾지 못했다. 결국 지르갈란에 대한 뚜렷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우리는 미지의 세계와 정면으로 부딪혀보기로 했다.


아이와 함께, 대책없는 키르기스스탄 배낭여행


씁쓸함으로 얼룩진 첫인상

다행히 ‘얀덱스고’ 앱으로 악수 온천에서 지르갈란까지 가는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60km 남짓, 한 시간 거리. 요금은 2,000솜, 우리 돈으로는 약 3만 원이었다. 무사히 도착하겠거니 안도하던 순간, 기사가 차를 세웠다. 험한 길을 달려왔으니 500솜을 더 내라는 요구였다. 처음부터 그랬다면 모를까, 다 와서야 꺼낸 말에 선뜻 수긍할 수 없었다. 단호히 거절하자 기사 얼굴에 순식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퉁명스럽게 핸들을 돌리는 동안 차 안엔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키르기스스탄 여행을 시작 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씁쓸했다. 미지의 여행지에 대한 설렘에 금이 간 순간이었다.


택시가 목적지 전에 내려줘서, 지르갈란 숙소 찾으러 가는길


오전에 알틴아라샨에서 하산해 악수 온천을 거쳐 지르갈란에 도착한 참이었다. 긴 하루의 끝, 오늘만큼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숙소에서 묵고 싶었다. 그래서, ‘마을에서 제일 좋다’는 레스토랑 겸 롯지인 ‘피크 롯지(Peak Lodge)’를 먼저 찾았다. 우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섰다.


지르갈란 마을에서 최고 럭셔리 숙소, 피크 롯지


키르기스스탄에서, 18만원짜리 숙소라니!

하지만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가격 앞에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특급 호텔을 떠올리게 하는 가격이었다. 단순히 금액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물가가 낮은 이곳에서의 18만 원은, 한국의 30~40만 원쯤이었다. 숫자보다 더 크게 마음을 누르는 건 그 ‘체감의 무게’였다. 그곳이 특별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다만, 18만원을 내고 머물 만큼의 감동은 아니었다는 거.


너무 힘들었어서, 잊지 못할 지르갈란 트레킹


최악으로 기울던 하루

택시에서 느꼈던 씁쓸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허름한 동네와 어울리지 않는 비싼 숙박비가 또다시 우리를 밀어냈다. 기대했던 따뜻함은 허공에 흩어지고, 해는 저물어가는 그 시각 우리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낯선 거리 한가운데 서 있다. 롯지 하나만 믿고 왔건만, 주변에 숙소라고는 없어 보였다. 숙소를 찾으려면 마을 아래로 한참을 걸어 내려가야 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연이어 등을 돌리던 지르갈란이, 결국 이번 여행 중 가장 따뜻한 기억으로 남게 되는데...


키르기스스탄에 사는 친구 집에 초대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두 번의 실망으로 지르갈란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꺼져가던 그때, 불현듯 마음을 적시는 장면 하나가 눈앞에 펼쳐졌다.


낡은 집의 작은 발코니 위, 노부부가 나란히 앉아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주황빛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려한 배경도, 근사한 집도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뒷모습은 기묘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씁쓸하게 가라앉아 있던 마음이 노을빛처럼 풀려나갔다.


‘오늘이 최악일지도 몰라’라고 중얼대던 그 순간,
뜻밖에도 지르갈란은
최고의 장면으로 우리 기억 속에 새겨졌다.

지르갈란 B&B, 방이 없어서 공용 공간인 거실에서 묵었다.


남편과 나, 아이는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집으로 홀린 듯 들어가 방이 있는지 물었다.


아주머니는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거실 같은 방을 서둘러 정리해주었다. 탁자를 옆으로 치우는 손길이 분주하면서도 따뜻했다. 그렇게 마련된 공간은 그날 밤 우리가 묵을 방이 되었다. 가격은 2,000솜, 세 명이 자는데 단돈 삼만 원. 아까 롯지에서 본 가격의 6분의 1이다. 오히려 믿을 수 없는 방 가격이었다.


제일 앞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사람이 B&B의 주인, 그리고 노부부
개인적으로 키르기스스탄 여행을 통틀어 가장 맛있었던 집밥


3만원 짜리 최고의 숙소

이미 들어설 때부터, 부엌에서 풍겨 나오던 냄새에 이곳에서 반드시 저녁을 먹어야겠다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인당 6,000원, 아이는 나눠 먹겠다 했더니 아주머니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2인분 가격만 계산했지만 결론적으로 아이 음식을 따로 주셨다.) 달궈진 팬에서 기름이 튀는 소리, 고소하게 볶아지는 가지의 향, 갓 끓인 수프의 김이 코끝을 스쳤다. 익숙한 냄새였다. 어린 날의 여름 저녁, 골목마다 번지던 밥 짓는 냄새와 엄마의 “밥 먹어라” 외침이 겹쳐지던, 기억 속 풍경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식사 시간이 되자, 아까 길에서 보았던 노부부가 내려와 자연스럽게 식탁에 함께 앉았다. 그들은 오늘 지르갈란 트레킹을 마치고 막 내려왔다고 했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알 수 없었던 길의 상황과 코스 이야기를, 현장에서 바로 만난 여행자의 입을 통해 듣는 것만큼 든든한 건 없었다.


인터넷과 책에 다 담기지 않은 이야기,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의 목소리, 현장에서만 얻을 수 있는 생생한 경험.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믿음직한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최악이라 부른 날, 최고의 기억

밤이 깊자 창밖의 노을빛은 서서히 사라지고 고요한 별빛이 차올랐다. 아이는 금세 곯아떨어졌고, 우리는 모처럼 마음을 푹 내려놓을 수 있었다. 화려한 시설도, 값비싼 요금도 없었지만, 그날 밤 우리가 얻은 건 훨씬 더 귀한 것이었다. 뜻밖의 만남, 그리고 친구네 집 같은 따뜻함.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온기였다.


'오늘이 최악일지도 몰라’라며 한숨을 내쉬던 하루는, 결국 우리 기억 속 가장 따뜻한 날로 남았다. 지르갈란이 건네준 소중한 선물이었다.



[다음 편 예고] 힘들고 처절했던 지르갈란 트레킹

따뜻한 그 밤이 지나고, 우리는 노부부가 알려준 길로 트레킹에 나선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하루를 마주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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