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OO, 잘 OO, 잘 OO 것
촐폰아타에서의 5일은 여행의 쉼표 같았다. 반짝이는 이식쿨 호수에 몸을 맡기고, 가족의 미소를 바라보며 숨 고른 날들. 하지만 쉼표는 문장을 이어가기 위한 잠깐의 멈춤일 뿐, 이제 다시 길 위로 나설 차례다. 우리의 목적지는 키르기스스탄의 동쪽 끝, 카라콜(Каракол/Karakol)이다.
촐폰아타에서 카라콜로 가는 방법을 알아보려 인터넷을 뒤졌지만 글마다 달랐다. 몇 년 전 기록은 A 위치에서 마슈르카를 타라고 하고, 최근 글은 B 위치에서도 탈 수 있다고 한다. 또 다른 글엔 “B에서는 사람이 몰려 서서 갈 수 있으니, 종점인 A에서 타는 게 낫다”고 조언했다.
이렇듯 이 나라의 정보는 늘 제각각이다. 여행자의 기록은 결국 ‘한 번의 경험’일 뿐이기에 누군가에겐 유용했던 정보가 내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확인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선택한 교통수단은 마슈르카(маршрутка, 마슈르트카). 러시아어권 나라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미니버스다. 정해진 버스 시간 같은 건 없고, 자리가 다 차면 출발한다. 요금은 택시보다 저렴하지만, 외국인에겐 바가지를 씌우거나 짐값을 따로 요구하기도 한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흥정도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앞장서는 건 늘 남편이다. 웃으며 흥정을 이어가던 그가 결국, 400솜을 300솜으로 깎았다. 우리는 두 번째 손님으로 마슈르카에 올랐고, 3분의 2 정도 자리가 차자 출발했다. 촐폰아타에서 카라콜까지 약 세 시간, 1인당 요금은 300솜(약 5,000원)이었다. (어쩌면 이 가격조차 바가지일 수 있다.)
카라콜로 향하는 길의 대부분은 비포장이었다. 마을 앞에 잠시 포장도로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문제는 차선도, 안전벨트도, 교통 규칙조차 없는 듯한 흙길을 시속 80km 이상으로 달린다는 것. 앞유리마다 금이 간 차가 이 나라의 도로 사정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였다. 숨쉬기 힘든 흙먼지가 끊임없이 차창으로 스며들었고, 아슬아슬한 곡예 추월은 예사였다.
요동치는 차 안에서 손잡이를 움켜쥔 채 온몸을 긴장시키고 있는 나와 달리, 아이는 그 흔들림마저 장난처럼 받아들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좁은 좌석 한 칸에 몸을 구겨 웅크리더니, 자신만의 편안한 자세를 찾아 눕고는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세상 어디서든 단단한 열 살의 비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것"
여행의 성공과 실패는 유명한 관광지를 몇 곳 가 보았는지, 계획을 얼마나 잘 지켰는지로 결정나지 않는다. 배부르게 먹고, 푹 자고, 마음 편히 화장실에 다녀오는 일. 피식 웃음이 날 만큼 사소해 보이지만, 이 세 가지만 지켜지면 어디든 천국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이 세 가지를 잘 못 해내면 아무리 멋진 풍경 앞에 있어도 즐겁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우리 아이는 이 ‘여행 잘하는 3대 스펙’을 완벽히 갖추었다. 어디서든 크게 아프지 않고, 먹는 것도 가리지 않으며, 심지어 배변 리듬마저 흔들림이 없다. 몸이 편해야 마음이 열리고, 그래야 길 위의 순간이 온전히 행복이 된다.
“엄마, 화장실 갈래!”
여행 중 오후 두 시 반이면 어김없이 터져 나오는 외침이었다. 문제는 그 시간이 늘 ‘길 위’라는 것.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매번 새로운 화장실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촐폰아타에서 출발한 마슈르카가 카라콜에 막 도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짐을 다 내리기도 전에 아이는 배를 부여잡고 화장실을 찾으며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돌아와 이렇게 말한다.
“엄마, 화장실 가게 돈 줘!”
돈을 내고 들어가야 하는 화장실 이야기는 지난 화를 참고하시길...
https://brunch.co.kr/@minarism0070/3
눈살 찌푸려지는 푸세식 화장실이든, 좁고 먼지 나는 버스 좌석이든 아이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 순응력에 엄마인 나조차 놀랄 때가 많다. 어쩌면 우리 셋 중 진짜 여행 체질은 아이일지도...
사실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 글을 쓸 때면 늘 조심스럽다. 우리 딸은 잔병치레가 거의 없고, 성향이 여행과 잘 맞아 다소 터프한 여정에도 잘 적응해왔다. 그래서 내게는 '아이와 하는 여행'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아이가 그렇지는 않다는 걸 잘 알기에, 여전히 '여행 육아(아이와 함께 여행하며 사는 삶)'에 관한 책을 쓰는 일은 망설여진다.
나의 기록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경험과 철학일 뿐, 보편적인 답은 아니다. 열 살 딸과 함께 배낭을 메고 중앙아시아로 한 달간 떠난 이야기에 적극 공감하고, 또 실행할 부모가 과연 얼마나 될까.
길 위에서 마주한 삶의 본질에 대하여
계획은 늘 어긋날 수 있고, 정보는 틀릴 수 있으며, 때론 함께 가는 길이 거칠 수도 있다. 그 모든 변수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은 언제나 '곁에 있는 사람'에서 나왔다. 나는 이제 확신한다. 우리 여행의 본질은 '함께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이 생각은 2년 전 더 깊어졌다. 세계여행 출발을 한 달 앞두고 남편이 폐암 1기 진단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중환자실에서 힘겹게 숨을 고르던 남편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현재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서로가 서로의 곁에 존재한다는 것.
그렇기에 길 위의 사소한 고민은 내게 감사의 이유가 된다. 오늘 무엇을 먹을지, 어디서 잘지, 화장실은 어디에 있을지. 이 단순한 세 가지가 해결되면 하루는 충분히 아름답다. 그 하루를 남편과 아이, 온전히 가족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길 위에서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이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것만
지켜진다면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아이는
그걸 너무도 자연스럽게 잘 해낸다.
연재 안내
란 패밀리의 기록을 기다려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 그 마음에 힘을 얻어 기쁘게 연재를 합니다. 매주 화·목·토 - 일주일에 세 번, 중앙아시아 가족 여행기를 전해드릴 거예요. 사진은 최대한 현장 느낌이 잘 나는 것으로 골라봅니다.
글을 읽는 분들께 작은 온기를 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앙아시아 여행이나 아이와 함께하는 배낭여행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댓글 남겨주세요. 연재에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