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그날] 성훈과 서영의 이야기,
교복을 벗고 처음으로 만났던 너
그때가 너도 가끔 생각나니
뭐가 그렇게도 좋았었는지
우리들만 있으면
너에게 데려다 주던 길을 걸으며 수줍게 나눴던 많은 꿈
너를 지켜 주겠다던 다짐 속에 그렇게 몇 해는 지나
너의 새 남자 친구 얘길 들었지 나 제대하기 얼마 전
이해했던 만큼 미움도 커졌었지만 오늘 난 감사드렸어
몇해 지나 얼핏 너를 봤을 때
누군가 널 그토록 아름답게 지켜 주고 있었음을
그리고 지금 내방에 나만을 믿고 있는 한 여자와
잠못드는 날 달래는 내 아기의 숨소리만이
새 학기가 시작되는 학교에는 그 옛날 우리의 모습이 있지
뭔가 분주하게 약속이 많은 스무 살의 설레임
너의 학교 그 앞을 난 가끔 거닐지 일상에 찌들어 갈 때면
우리 슬픈 계산이 없었던 시절 난 만날 수 있을 테니
너의 새 남자친구 얘길들었지 나 제대하기 얼마전
이해했던 만큼 미움도 커졌었지만 오늘 난 감사드렸어
몇해 지나 얼핏 너를 봤을 때
누군가 널 그토록 아름답게 지켜 주고 있었음을
그리고 지금내방 나만을 믿고 사는 한 여자와
잠못드는 날 달래는 내 아기의 숨소리만이
비가 올 것 같은 하늘이었다. 회색빛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공기엔 젖은 흙 냄새가 은은하게 스며들었다. 성훈은 퇴근길에 일부러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목적지는 없었다. 하지만 몸이 그 길로 이끌렸다.
그 길, 서영을 처음으로 데려다주었던 골목. 그 길을 걷는 것은 어쩌면 오래된 의식 같았다. 특별한 이유도 없고, 계획도 없었지만, 일 년에 몇 번은 그렇게 걷게 되었다. 누구에게 말하지 않았고, 말할 이유도 없었다. 그냥 그 길에 닿으면, 마음이 잔잔해졌다.
스무 살, 교복을 벗고 만나 처음으로 손을 잡았던 봄날. 서영은 긴 머리를 뒤로 넘기며 웃었고, 성훈은 그 미소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널 지켜줄게." 그 말은 대단한 선언이라기보단, 숨을 내쉬듯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화였다.
그때의 사랑은 낭만적이었다. 순수하고, 겁이 없었다. 두 사람은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고, 함께 가고 싶은 도시와 살고 싶은 집에 대해 이야기했다. 서영은 초록색 이층집이 좋다고 했고, 성훈은 그 집 앞에 작은 벤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밤이 깊으면, 성훈은 서영을 데려다주곤 했다. 동네 골목을 함께 걷다 보면, 서영은 종종 발끝을 맞춰 성훈과 보폭을 맞췄다.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너무 좋아서, 성훈은 항상 마지막 인사를 망설였다. 서영의 뒷모습이 골목을 따라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날도 많았다.
그들은 짧지만 깊은 사랑을 했다. 하지만 성훈이 군대를 가게 되면서 두 사람 사이엔 거리가 생겼다. 처음 몇 달은 편지가 오갔다. 서영은 매주 엽서를 보냈고, 성훈은 밤마다 답장을 썼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답장이 늦어졌고, 엽서도 간헐적으로 변해갔다.
성훈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지금은 다들 바쁘고, 시험도 있고, 인생이 한창 복잡할 때니까.” 그런 말로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불안은 조용히 자라났다. 전역을 몇 달 앞두고, 고등학교 동창에게 들은 소식은 단 한 문장이었다.
“서영이 남자친구 생겼대.”
그날 밤, 성훈은 혼자 훈련소 뒤편 야산을 걸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고, 밤하늘엔 별이 많았다. 소리내 울지 않으려 애썼지만, 눈물은 목울대를 넘어 나왔다.
“조금만 기다려주지..” 억울함과 배신감, 자책과 미련이 한꺼번에 덮쳐왔다. 이해하고 싶었지만, 이해하는 만큼, 사랑했던 만큼 미웠다.그 후론 편지를 쓰지 않았다. 보내지도, 받지도 않았다.
세월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렀다. 몇 해 뒤, 성훈은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서영을 다시 만났다. 멀리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서영은 예전보다 더 단정한 옷차림에, 한 남자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안정감이 가득했고, 얼굴엔 여유가 번져 있었다.
성훈은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속이 쓰리거나 아프진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서영이 그토록 아름답게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에, 이상하게도 고마움이 먼저 들었다.
그녀가 자신을 보지 못한 채 사라질 때까지, 성훈은 조용히 서 있었다. 돌아서며 속으로 말했다.
"고맙다. 그렇게 웃어줘서."
지금 성훈은 한 여자의 남편이고, 한 아이의 아빠다. 아내는 말보다 믿음이 많은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조용히 곁에 있어주었고, 성훈이 아무 말도 못할 때도 기다려주었다. 둘은 작은 방에서 시작했다. 이불 하나 깔면 가득 찼고, 겨울엔 찬바람이 틈새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 방엔 따뜻한 밥 냄새와, 서로를 위한 시선이 있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 삶은 다시 바뀌었다. 잠 못 드는 밤이 많아졌고, 걱정도 많아졌다. 하지만 아이의 숨소리를 듣고 있으면, 모든 것이 견딜만했다. 가끔 아내가 피곤해 조용히 등을 돌리고 누워 있을 때, 성훈은 혼자 생각했다. "나의 그 한사람이 이 사람이었구나. 사랑한다 " 그때 비로소 스무 살에 했던 약속이 진짜 의미를 가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성훈은 여전히 가끔 서영의 대학 근처를 걷는다. 누구를 찾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거리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그 시절의 감정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정류장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청춘들, 교문 앞 벤치에 앉아 웃고 있는 연인들, 분주한 약속에 들뜬 스무 살의 눈빛들.
그 풍경 속에서 그는 자신을 본다. 그 시절, 사랑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던 두 사람. 계산 없는 시간, 무모했지만 순수했던 꿈들. 그곳을 떠날 땐 늘 같은 생각이 든다.
“잘 지냈으면 좋겠다. 어디서든, 누구와 있든.”
성훈을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졸업식이 끝난 날이었다. 교복을 벗고 마주 앉았을 때, 그는 말이 많지 않았지만 눈빛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서툴게 알아가며, 너무 빠르게 마음을 내주었다.
처음엔 그가 웃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밤마다 데려다주는 길, 바람에 머리가 흩날리면 그는 늘 살며시 손으로 정리해줬다. 그 손길이 세상의 전부 같았다.
그러다 시간이 왔다. 그가 군대를 가게 되었고, 나는 홀로 남겨졌다. 성훈은 힘들고 고된 훈련소에서도 편지를 썼다. 매일의 작은 이야기들, 나를 걱정하는 말, “잘 지내고 있지?”라는 문장이 꼭 들어 있었다.
처음 몇 달은 나도 열심히 답장을 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를 떠올리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시험을 준비하고, 각자의 생활이 분주해졌다.
무엇보다, 나는 점점 지쳐갔다.
성훈에게는 항상 '괜찮은 나'만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
“기다릴게”라는 말이 점점 나를 옭아맸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거짓말을 쓰기 시작했다.
잘 지내고 있다고, 여전히 널 생각한다고.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은 점점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남자를 만난 건 봄이었다.
같은 수업을 듣던 선배였고, 따뜻하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성훈과는 다른 방식으로 내 마음을 두드렸다.
미안했지만, 숨길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나는 성훈에게 말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고,
성훈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두려웠다.
결국,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멀어졌다.
편지는 오지 않았고, 나도 보내지 않았다.
헤어짐조차 없는 끝이었다.
몇 해가 지나, 거리에서 성훈을 보았다.
멀리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전히 조용한 눈빛.
하지만 그 옆엔 여자가 있었고, 그들의 사이엔 아이가 있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안도했다.
그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
그가 누군가와 행복하다는 사실이,
내가 가진 죄책감을 조금 덜어주었다.
그 후로 가끔 생각했다.
만약 그때 조금만 더 성숙했다면,
조금만 더 기다릴 수 있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지만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어른이 된다.
나는 그를 두고 떠남으로써,
그는 나를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잊음으로써.
지금 나는 다른 사람과 살고 있다.
그는 나에게 묻지 않는다.
예전에 누구를 사랑했는지, 어떤 이별을 했는지.
그런 점이 나를 편하게 만든다.
가끔 아이를 재우고, 조용한 거실에 앉아 있으면
문득 어떤 노래 가사 한 줄이 떠오른다.
“그때가 너도 가끔 생각나니…”
나도 생각난다.
벚꽃이 피던 날, 처음 손을 잡았던 순간,
교문 앞에서 “내가 널 지켜줄게”라고 말하던 그의 목소리.
그 시절의 우리는 참 따뜻했고, 참 서툴렀다.
지금도 나는 그 봄을 잊지 않는다.
하지만,
그 봄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사랑은 시간이 흐르며 형태를 바꾼다. 어떤 사랑은 첫눈처럼 잠깐 머물다 가고, 어떤 사랑은 뿌리처럼 삶의 중심에 남는다. 이 이야기는 그 모든 사랑이 결국 우리를 성장하게 한다는 믿음에 대한 헌사이다.
이야기의 양면을 본다는 것은, 한쪽이 상처받았다고 해서 다른 쪽이 가해자라는 뜻은 아니다. 서영의 선택은 이기적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또한 한 사람의 성장통이었고, 잊히지 않는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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