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란, 잊히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
이젠 버틸 순 없다고 휑한 웃음으로
내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았지만
이젠 말할 수 있는 걸
너의 슬픈 눈빛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걸
나에게 말해봐
너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볼 수만 있다면
철없던 나의 모습이 얼만큼 의미가 될 수 있는지
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 지쳐갈 때 내 마음 속으로
스러져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찾아와
생각이 나겠지 너무 커 버린 미래의 그 꿈들 속으로
잊혀져 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생각날까
너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볼 수만 있다면
철없던 나의 모습이 얼만큼 의미가 될 수 있는지
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 지쳐갈 때
내 마음 속으로 스러져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찾아와
생각이 나겠지 너무 커 버린 내 미래의 그 꿈들 속으로
잊혀져 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생각날까 많은 날이 지나고
비가 오기 직전의 하늘처럼 눅눅한 오후였다. 성민은 오랜만에 서울역 근처의 작은 카페에 들어섰다.
두꺼운 코트를 벗고 자리에 앉자마자, 종업원이 커피를 내왔다. 그는 잔을 감싼 손끝에 미묘한 떨림이 느껴지는 걸 감췄다.
오늘은 수진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몇 년 만의 연락.
그녀가 먼저 문자를 보냈다.
“시간 괜찮으면, 잠깐 얼굴만 보자.”
그는 짧게 “그래”라고 답했지만, 마음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마치 오래 묵힌 봉투를 여는 느낌.
한때 전부였던 무언가가 다시 꺼내질 것만 같았다.
수진은 말수가 적었다.
늘 말 대신 눈으로 말하던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녀는 모서리 있는 컵을 양손으로 감싸 쥔 채, 잔잔히 웃었다.
“잘 지냈어?”
그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뭐, 그럭저럭.”
그 단어 하나가 담고 있는 감정의 층위를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럭저럭이라는 말은 단지 무난함이 아니라, 더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는 뜻일 테니까.
“그날 기억나?”
그가 먼저 말했다.
“어떤 날?”
그녀가 되묻는다.
“…마지막이었던 날.”
그녀는 눈길을 피했다. 그 날을 모를 리 없었다.
그녀가 그의 어깨에 조용히 기대어 말없이 울던 날.
한참을 침묵하다가 꺼냈던 말.
“이젠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를 안아주지도, 붙잡지도 않았다.
그 순간의 침묵이 지금도 가끔 그의 귓가를 울린다.
“그때, 사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잘 몰랐어.”
수진이 말했다.
“무슨 말이야?”
“넌 항상 내 옆에 있었지만, 내 마음 곁에는 오지 않았어.”
그 말이 그의 가슴을 조용히 파고들었다.
그녀가 외로웠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자신이 처절하게 부끄러워졌다.
그는 그때를 떠올렸다.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불안하고 초조한 나날들 속에서,
그녀의 메시지에 종종 무뚝뚝하게 답했고, 약속도 몇 번이나 미뤘다.
그녀는 기다렸다.
말없이, 묵묵히, 하지만 점점 작아지는 마음으로.
그는 믿고 있었다.
사랑은 기다리는 거라고.
그러다 보면 서로를 더 단단히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것은 미숙한 확신이었다.
“지금은 어때?”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그냥 일하고, 친구 만나고, 그렇게 살아. 가끔… 문득 떠오르긴 해.”
그녀는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생각이 나더라. 너무 커버린 미래 속에서…
너의 기억이, 가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은 마치 가사처럼, 천천히 그의 마음을 물들였다.
그 시절, 그녀를 지치게 했던 자신의 무심함이 이제야 선명하게 보였다.
카페를 나서며 그녀는 미소 지었다.
“잘 살아. 진심이야.”
“그래, 너도.”
그녀가 횡단보도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그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은 여전히 단정했고, 조용했으며, 조금은 아련했다.
그날 밤, 성민은 오랜만에 노트를 꺼냈다.
군더더기 없는 펜촉으로 조심스럽게 적었다.
“기억이란 건, 잊히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지나간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남는 것 같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녀는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장면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 장면은 아직도 마음 한켠에서
조용히, 그리고 아름답게 스러지지 않고 있었다.
그건 여전히
‘기억의 습작’이었다.
이별에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성격의 차이, 생활의 변화, 또는 말로 다 하지 못한 감정의 균열.
그러나 진짜 이별은, 마음이 천천히 멀어지는 과정 속에서 일어납니다.
누구도 떠나겠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붙잡지 않았기 때문에 끝나버리는 관계들.
어쩌면《기억의 습작》은 그런 사랑의 이야기인듯 합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어쩌면 알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던 마음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문득 떠오른 이름.
이야기 속 인물들은 우리의 과거와 닮아 있고,
때로는 우리가 놓쳤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랑이 끝난 후에도, 마음은 질문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때 나는 정말 사랑했을까?”
“그 사람은 나를 이해하고 있었을까?”
“그 마지막 순간, 나는 옳았던 걸까?”
기억은 시간이 만든 가장 섬세한 흔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흔적을 따라, 조용히 성장합니다.
사랑이 남긴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열 수 있는 한 편의 습작으로 남아
우리를 다듬고, 다독이고, 다시 걷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