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수업 중에 유찬이가 들어왔다. 노브랜드버거 면접을 보고 오는 길이다.
아이들은 각자의 책상에서 교재를 푸느라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찬이는 수업시간에 왔다 갔다 하게 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자기가 이 집에 있다는 것을 몰랐으면 좋겠다고 한다. 내가 수업준비를 하듯이 유찬이는 수업 시간 내에 방 밖으로 나오지 않을 준비를 한다. 화장실도 다녀오고 간식은 방으로 가져다 놓는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해도 고집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스스로 받아들이고 괜찮다고 생각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20년 전에 이미 내가 이 아이에게 해 줄 수 있은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지 않았던가
호기심 많은 엄마와 조심성 많은 아들.
18개월 때 문화센터에 처음 간 날, 아이들은 이것저것 만지고 관심을 끄는 장난감이나 노래에 반응 보이며 노는데, 유찬이는 내 무릎에 앉아서 가만히 지켜봤다. 몇 번 내가 떠밀며 같이 하자고 해도 엉덩이를 빼고는 협조하지 않았다. 다음 주도, 그다음 주도.
3주를 유찬이는 가만히 앉아서 수업을 지켜봤다. 몇 번 같이 하자고 권했지만 하지 않았다. 답답함이 극에 달했지만, 그냥 참았다. 아마도 그때 육아서를 한참 읽고 있을 때라 뭔가 강요하면 안 된다는 것을 지키려고 했던 거 같다. 기다린 것이 아니라 화를 누르고 참았다. 그리고 네 번째 수업 때 유찬이는 움직였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재미있게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했다. 정말 그동안 지켜본 거였다. 그리고 그때 난 알았다. 내가 이 아이에게 해 줄 유일한 것이 ‘기다림’이라는 것을. 나에게 가장 취약한 ‘기다림’.
주말에만 볼 때는 아들과 나의 시간차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함께 살면서 그 시간차를 좁히는 것은 쉽지 않다.
면접이 어땠는지 너무 궁금해서 방으로 들어간 아들에게 톡을 보냈다.
‘면접 잘 봤어?’
‘나중에 수업 끝나고 이야기해요’
수업 끝나고 이야기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아니 한 번을 그냥 대답을 안 해준다.
***
방문을 닫자마자 톡이 온다. 분명 엄마 일 것이다. 한 번도 엄마는 내 예상을 벗어나질 않으신다. 내가 답을 안 해줄 것을 알면서도 물어보시는 거겠지?
거창한 면접 같은 건 아니었다. 꿈이 뭐냐는 둥 꼰대처럼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는 게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대단히 고민하면서 지원한 것도 아니니 그냥 대충 흘려들었다. 맘에 들고 안 들고 고를 처지가 아니다. 다이소랑 여기에서만 연락이 왔다. 주 3회, 14시간 근무고 정해진 요일이나 시간대가 아니라 수요일에 다음 주 일정이 나온다고 했다. 오픈이나 미들이 될 거라고 했고, 3주는 수습기간으로 입금을 80% 준다고 했다. 얼마 안 되는 시급에 80%를 준다는 말에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원래 그런 거겠지 했다. 이번 주는 수요일, 목요일, 토요일에 9시까지 오면 된다고 했다. 사이트를 하나 알려주면서 수요일에 올 때 버거별 들어가는 재료를 다 외워오라고 했다. 그리고 월급 받을 통장 사본하고 주민등록증 사본도 챙겨 오라고 했다. 집에 오는 길에 알려준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버거가 너무 많고, 그 안에 들어가는 재료는 더 다양하고 많았다. 이걸 어떻게 다 외우란 말인가? 머리 쓰는 일 하기 싫은데, 미쳐버리겠네 정말.
마지막 타임 아이들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거 보니 6시가 다 되어가나 보다. 저녁 먹고 다이소를 가야 한다. 나갔다 와서 샤워도 못했는데 어차피 다이소가면 땀 한 바가지 흘릴 테니 다녀와서 씻는 게 나을 듯하다.
-너는 대충 톡으로 이야기해 주면 되지 사람 궁금하게.
-대충 어떻게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하기로 한 거야?
-일단 이번 주는 수요일부터 나가기로 했어요.
-‘이번 주는’이 뭔 말이야?
-엄마 빨리 저녁 먹고 다이소 다녀와야 할 거 같은데요. 시간이...
-아! 맞다.
-아르바이트 다녀와서 다시 이야기해요. 그리고 오늘은 자전거 타고 갔다 올게요.
-더운데 당분간 엄마가 데려다줄게.
-아니에요. 저 빨리 밥 주세요.
엄마네 내 자전거가 있었다. 몇 달 전에 엄마가 자전거 타고 싶으시다면서 안 타면 엄마가 좀 타도 되겠냐고 해서 갖다 놓은 자전거다. 당연히 차가 편하긴 하지만, 뭐 대단한 일 하러 다닌다니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불편하다. 오늘 자전거로 다녀와 보고 괜찮으면 다이소는 자전거로 다니는 게 좋을 거 같다. 차로 갈 때보다는 일찍 나가야 하는데 무슨 진수성찬을 차리시나 밥 먹으라는 소리가 아직이다.
#31
-거 봐요 엄마, 햄버거 레시피 다 외워야 하는 거였어요.
-뭐라고? 그걸 하루 만에 어떻게 다 외워? 그리고 보통 레시피는 벽에 붙여놓기 마련인데, 아니 뭐 시험이라고 봤어?
-바로 만들어야 하는 거였어요.
-뭐라는 거야? 그게 말이 되냐고?
-그래서 3주는 수습기간으로 시급 80%만 준다고 한 건가 봐요. 최대한 빨리 외우라고 사장이 뭐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결국 혼자 매장을 봐야 하는 거 같더라고요.
유찬이는 햄버거 이름과 레시피를 외워야 한다면서 사이트에 들어가서는 공책에 자기식으로 레시피를 정리하고 있었다. 너무 하기 싫다고 하면서도 일을 하기로 한 거니 어찌어찌 외우고 있었다.. 한참을 적고 외우더니 나보고 노트를 주면서 햄버거 이름을 불러달란다. 재료들이 올라가는 순서까지 외워야 한단다. 이렇게까지 외워야 한다고? 나는 의심이 들었다. 당연히 주방에 레시피가 붙어 있을 거라고 확신했고, 사장이 신입이니까 그래도 메뉴는 알아야 하니 어느 정도 성의만 보이면 되는 걸 거라고 강력하게 말했다. 그래도 불안했는지 수요일 출근하기 전까지 열심히 외웠다.
마치는 시간에 데리러 갔더니 차에 타면서 엄마가 틀렸다며 큰 소리를 친 거다. 이번엔 몸에서 기름냄새가 진동을 한다. 꼭 이렇게까지 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건지,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이 든다.
노브랜드버거에 다녀온 날은 옷에 기름냄새가 배어서 저녁에 다이소에 또 입고 가기 그렇다고 비슷한 재질의 긴 바지를 하나 더 구입했다. 전에 사자고 했을 때 같이 샀으면 두 번 일은 안 하는 건데, 참 엄마 말 안 듣는다.
여름이고 기능성 바지이다 보니 빨아서 널어놓으면 금방 마르니 두벌이면 충분하긴 했다. 하지만 검은색이다 보니 어느 정도 물이 빠질 때까지는 다른 빨랫감과 세탁기를 돌리지 말라고 되어 있었다. 손빨래를 해보니 물 빠짐이 좀 있었다. 아마도 저렴한 옷이라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유찬이에게 샤워하면서 바지를 조물조물 빨아서 널어놓으라고 했더니 ‘엄마가 해주시면 안 돼요?’라고 한다.
내가 없는 10년 동안 남자 셋이서 살림을 나눠가며 했단다. 웬만하면 식사는 아빠가 챙겨주셨지만 설거지나 분리수거, 빨래는 셋이서 돌아가면서 하거나 함께 했다고 했다. 유찬이는 깔끔한 성격이고 잔소리 듣는걸 극도로 싫어해서 잘 치우는 편이지만, 유준이는 자신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 놓는 스타일이다. 그렇다 보니 유준이가 치우지 않은 식탁이나 거실의 물건들을 유찬이가 대신 치우게 되는 일도 많았고, 유준이가 치우지 않은 것 때문에 퇴근해서 온 아빠에게 잔소리를 듣게 되는 일들이 있다 보니 주말이면 나에게 유준이를 고발하기 바빴다.
자기들은 지금 바로 혼자 살라고 해도 살 수 있을 만큼 할 수 있는 집안일이 많다고 했다.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시기에 함께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언제쯤 나를 자유롭게 해 줄까?
그래서였겠지? ‘엄마가 해주면 안 돼요?’라는 말에 어떤 말도 생각나지 않는 것이 말이다.
***
햄버거 레시피를 아무리 외워가도 막상 주문이 들어오면 당황해서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배달주문이 계속 들어오고, 매장 손님들 주문까지 처리해야 하니 정말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다고 했다. 지금은 일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함께 있어서 다행인데, 다음 주부터는 점심시간까지 혼자서 근무를 해야 한단다.
-아무래도 노브랜드는 관둬야 할거 같아요.
-지난주, 이번주 해서 이제 5일 됐는데, 관둔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거 같아요.
-그렇게 판단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 아닐까?
-사실 레시피 외우는 거부터 별로였어요. 엄마 말대로 이제 5일 근무한 사람한테 가장 바쁜 시간에 혼자서 근무하라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지금 저 알려주는 사람하고 둘이서 해도 바쁘고 정신이 없는데, 이 돈 받고 이렇게까지 할 일은 아닌 거 같아요. 이건 말이 안 돼요.
-좀 무리이긴 한 거 같은데, 그래도 해보고 결정하는 게 낫지 않겠어? 아님 다른 아르바이트를 알아보고 관둬도 늦지 않을 거 같은데?
-사실 제가 너무 아무 생각 없이 면접보고 제대로 어떤 일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하겠다고 했던 거 같아요. 다음에 구할 땐 좀 더 구체적으로 검색해서 알아보려고요. 일단 주방일은 저하고 안 맞는 거 같아요. 근데 제가 근로계약서에 6개월 일하겠다고 사인을 했는데 지금 관둔다고 하면 혹시 돈 못 받는 거 아닐까요?
-그렇진 않아. 일한 만큼은 주게 되어 있어. 당장 안 나겠다고 할 거야?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처음 일을 관두는 거라...
-엄마는 일 시작하는 거보다 일 관두는 게 더 어렵기도 하더라.
전화로 의사를 밝히기를 바랐으나, 톡으로 먼저 의사를 밝혔고, 3일 더 일하고 마무리하기로 했다고 했다. 8일이라는 초단기 아르바이트였지만 일을 구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단다. 자신의 태도를 보게 해 줬다면 그것으로 이 경험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