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눈동자에서 시작된 온기
그림 속 한 마리 소가 나를 바라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소의 눈동자에 내가 멈춰 선다.
이마를 감싸는 거칠고 따스한 털, 바람을 머금은 듯한 귀의 흐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고요히 품고 있는 한 점의 눈.
나는 그 눈동자 앞에서 한참을 머문다.
거기엔 어떤 말도, 설명도 필요 없다.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말랑해진다.
지쳐 있던 나를, 아무 말 없이 토닥여주는 눈빛이다.
그 눈은 말한다.
“괜찮아, 너 참 많이 애썼어.”
붓을 들고 처음 이 소의 눈을 마주했을 때, 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묘하게 끌렸다.
무언가가 마음 깊은 곳을 가만히 건드리는 느낌.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감정에 이끌려, 나는 이 눈동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사실 많은 그림이 그렇다.
시작은 늘 막연하다.
왜 그리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그저 손이 움직이고, 색이 얹히고, 형체가 잡혀간다.
그렇게 그리는 동안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아, 나는 이 감정을 그리려고 했구나.
나는 이 마음을 말하고 싶었던 거구나.
그림이 가진 힘은 때로 이렇게 조용하게 다가온다.
누군가의 시선, 그 너머에 담긴 온기가 나를 어루만질 때, 나는 비로소 내 안의 상처를 직면할 수 있게 된다.
그림은 말이 없지만, 그림은 가장 정확하게 말한다.
그건 언어가 닿지 못하는 감정의 언저리까지 스며들어 나를 안아주는 힘이다.
이 소의 눈빛도 그랬다.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그 눈 속에는 슬픔인지, 고요한 포용인지, 말 못 할 다정함인지
분명하지 않은 감정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스미는 석양.
하루가 끝나는 시간,
그 등 뒤로 흐르는 붉고 황금빛의 잔상은 묘하게도 내 마음의 색과 닮아 있었다.
따뜻하지만 어쩐지 짠하고,
아름답지만 가슴 한구석이 시려오는 빛.
나는 그 장면에 오래 머물렀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나는 점점 더 그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 눈동자에 끌렸던 이유는, 그 안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을 버텨내는, 말없이 살아가는 내 마음.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못했던 감정이 그 눈 속에 가만히 담겨 있었다.
그림을 그린다는 건, 단지 색을 얹는 일이 아니다. 마음을 담는 일이다.
그 마음이 이 붓결을 타고 전해져 나에게 닿았을 때, 나는 비로소 그림이 아니라,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예술은 그렇게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우리가 외면해 온 마음 한가운데로.
그리고 그리는 행위는, 내 안의 나를 꺼내어 마주 보는 여정이 된다.
나는 그 눈을 그리며, 나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이유 없이 끌렸던 감정의 실마리가 풀리고, 지나온 내 시간들이 하나의 색으로 남는다.
그림이 완성된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 그림은 소의 눈을 그린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창을 그린 것이었다는 것을.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이렇게 조용히 바라봐주는 눈빛 하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말없이,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누군가.
그게 때로는 한 마리 소의 눈일 수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한 장의 그림일 수도 있다.
예술은 삶을 바꾼다.
그건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아주 작고 조용한 순간에서 시작된다.
어느 날 문득, 내 눈이 머문 한 장면.
그 장면을 그려보겠다는 충동.
그리고 붓을 쥐고 캔버스 앞에 앉아 나도 몰랐던 나와 마주하는 일.
나는 아직도 내가 왜 이 소를 그렸는지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나는 조금씩 나를 회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게 바로 예술의 치유력일 것이다.
그림은 내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괜찮아. 너는 그저, 너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중이었을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