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초상화의 매력에 대하여
– 연필 초상화의 매력에 대하여
연필로 그려진 그림이다. 그림이 완성되고 나는 그 안에 숨결이 느껴졌다. 정적인 이미지인데도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졌고, 말이 없는데도 마음을 건드리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초상화란 단순히 얼굴을 담는 그림이 아니라, ‘존재’를 담아내는 작업이라는 것을.
초상화는 오래전부터 인간이 ‘기억하고자 하는 것’을 기록해 온 방식 중 하나다. 왕의 위엄을 남기고, 연인의 얼굴을 가슴에 담으며, 가족의 역사를 후대에 전하고자 했던 그 욕망의 자리에 언제나 초상화가 있었다. 디지털 시대인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여전히 초상화를 그린다. 정교한 카메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으로 그리는 행위를 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질문의 답은 바로 ‘마음의 해석’에 있다.
연필로 그려진 초상화는 단순한 재현이 아니다. 작가는 대상의 외형뿐 아니라 내면을 관찰하고, 감정을 읽고, 그 사람의 ‘어떤 순간’을 고르고 기억한다. 사진이 0.01초의 찰나를 포착한다면, 초상화는 그 사람과 함께한 시간 전체를 그림 속에 녹여낸다. 따라서 연필 초상화는 ‘그 사람에 대한 시선’이자, ‘작가의 해석’이기도 하다.
특히 연필이라는 도구는 초상화에 특별한 감정을 더해준다. 연필은 부드럽고 섬세하며, 동시에 단호한 힘을 지닌 매체다. 강하게 누르면 짙은 어둠이 되고, 살짝 스치면 가장 투명한 여백을 만든다. 그 점에서 연필은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도구가 아닐까 싶다. 감정을 꾹 눌러 담기도 하고, 조심스럽게 드러내기도 하면서, 한 사람의 얼굴을 천천히 그려간다.
연필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은 긴 호흡을 요구한다. 형태를 잡고, 명암을 쌓고, 얼굴의 흐름과 결을 따라가며 점차 사람의 형상을 갖춰간다. 그러나 진짜 사람의 느낌은 언제 들어오는가?
바로 ‘눈’을 그리는 마지막 순간이다.
눈은 얼굴의 중심이며, 감정의 출입구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처럼, 초상화에서도 눈이 생명을 불어넣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작가로서 내가 초상화를 그릴 때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 바로 이 ‘눈’을 그릴 때다. 동공을 가늘게 칠하고, 빛이 머무는 하이라이트를 조심스럽게 찍어 넣을 때, 갑자기 그림이 나를 쳐다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때 나는 아, 이제야 이 그림이 살아났구나, 하고 느낀다.
눈이 완성되는 순간, 초상화는 단순한 묘사를 넘어 ‘만남’의 장이 된다. 그것은 작가가 인물과 나눈 대화의 흔적이고, 관람자가 그림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통로다. 때로는 그 눈빛 속에 슬픔이 담겨 있고, 때로는 담담함이, 또는 오래된 기억과 바람이 어른거린다. 보는 이가 그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투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초상화를 그리고 있노라면, 어느덧 ‘그 사람을 닮아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연필을 쥔 손끝에서 타인의 얼굴을 빌려 나 자신을 그려내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초상화가 ‘사람을 그리는 일’이면서도 동시에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얼굴을 따라 그리는 것은 결국, 타인의 삶과 감정을 존중하는 방식이자, 그 안에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과정이다.
한쪽 팔을 괸 채 정면을 바라보는 이 인물은 그 자체로 고요한 응시의 힘을 보여준다.
눈빛 속에 담긴 건 정지된 시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생각들이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그릴 때마다 그녀의 침묵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그 정적인 자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감정들을 포착하고 싶었다.
연필의 번짐마저 그녀의 속삭임 같았다.
이 인물은 마치 무언가를 생각하며, 세상을 가늠하려는 듯하다.
손등 너머로 먼 곳을 바라보는 눈은 집중하면서도 슬쩍 흔들린다.
그를 그리는 동안, 나 역시 그가 바라보는 것을 상상해 보게 되었고,
한 줄 한 줄 그을 때마다 ‘사람을 그리는 것’이 아닌 ‘사람의 마음을 좇는 것’ 같았다.
어두운 니트의 질감과 부드러운 눈가의 대비는, 삶의 부조화를 닮아 있었다.
이 초상화는 흑연의 결이 가장 부드럽게 내려앉은 작품이었다.
그의 얼굴엔 어떤 강한 감정도, 극적인 긴장도 없지만
바로 그 담담함이 보는 이의 마음을 오래 머물게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동자 안에 아주 작은 슬픔이 맴돌고 있었고,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나도 모르게 연필을 멈추고 오래 바라봤다.
초상화는 때로 그 사람보다 더 깊은 그 사람을 보여준다.
뒤돌아보는 이 자세는 언제나 묘한 긴장을 만든다.
도망치는 듯하면서도, 붙잡아달라는 듯한 이중적인 눈빛.
그녀를 그리는 동안 ‘머무름과 떠남’이라는 단어가 자꾸 떠올랐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매끄러운 어깨 라인은
날카로움과 부드러움 사이의 경계를 닮았다.
이 그림이 완성된 후, 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내게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많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이 작품은 유독 오래 걸렸다.
왜냐하면 ‘순수함’은 그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이는 말하지 않지만, 온 얼굴로 질문을 던진다.
그 눈동자엔 '나는 누구인가'보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렸다.
아이를 그릴 때는 내가 작가이기 이전에 한 명의 어른으로 존재해야 했다.
그래서 이 그림은 단순한 초상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대화이기도 했다.
이 인물은 전형적인 강인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했다.
눈빛은 단호했지만, 입술 끝은 미묘하게 풀어져 있었다.
잘 알려진 인물을 그릴 때의 어려움은 ‘있는 그대로 그리되, 새로운 무언가를 드러내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눈과 코, 입의 간격보다
그 얼굴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를 먼저 포착하려 했다.
그는 그저 유명한 누군가가 아니라, 한 인간이었다.
그리는 동안은 세상의 소음이 멈추고,
그림 밖의 내가 그림 속의 그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
그 기억과 소회는 당신의 연필 끝에서 다시 생명을 얻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언젠가 연필을 들어 누군가의 얼굴을 그려본다면, 그 속에 담긴 감정의 농도에 주목해 보길 바란다. 연필 선 하나하나가 얼마나 많은 마음을 품고 있는지, 눈빛 하나에 어떤 이야기가 흐르고 있는지. 초상화는 그저 기술의 산물이 아니라, 감정의 기록이자 영혼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눈동자에 점 하나를 찍는 그 순간. 그 사람의 숨결이, 마치 조용히 그림 밖으로 흘러나오는 듯한 기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