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기에 아름다운 순간들
물결이 햇살을 머금은 오후, 바람은 조용히 치맛자락을 흔든다. 호아킨 소로야의 대표작 《바닷가의 산책(Paseo a orillas del mar, 1909)》은 그런 순간을 담고 있다. 캔버스 안에는 두 여인이 나란히 해변을 걷는다. 그녀들은 말이 없다. 하지만 그 고요 속에 감정은 밀려오고, 빛은 이야기를 건넨다. 이 작품은 단지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 가족, 시간, 그리고 삶의 찰나를 깊이 있게 바라보는 한 화가의 시선이다.
그 여인은 소로야의 아내, 클로틸데였다. 그리고 곁을 걷는 소녀는 그의 딸, 마리아. 이 그림은 단지 누군가의 ‘초상’이 아닌, 소로야의 인생 그 자체였다. 클로틸데는 그의 삶에서 뮤즈였고, 동반자였으며, 세상 누구보다도 깊은 사랑을 나눈 사람이었다. 소로야는 여행 중에도 매일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You are my body, my life, my mind, my perpetual ideal.”
그의 붓끝에서 그녀는 늘 눈부신 빛과 함께 존재했다. 소로야는 클로틸데를 통해 세상의 빛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 생을 노래했다.
《바닷가의 산책》은 그런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그림이다. 캔버스에는 격정도, 극적인 사건도 없다. 그러나 그 속엔 가장 진실된 사랑의 풍경이 있다. 함께 걷는 그 시간이,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있는 그 순간이, 소로야가 인생에서 가장 소중히 여긴 찰나였던 것이다. 그는 이 찰나를 붙잡고자 했다. 햇살이 모래 위에 부서지고, 바람이 치마를 스치며 지나가는 그 감각을 그는 영원으로 만들고 싶었다.
소로야는 스페인의 루미니즘(Luminismo)을 대표하는 화가다. 그의 작품은 빛의 찰나를 포착한다. 마치 인생의 모든 순간이 한낮 햇빛의 반짝임처럼 짧고 소중하다는 듯. 그는 삶을 찬란한 순간의 연결로 보았다. 바닷가에서 웃고 있는 아이들, 빨래를 널고 있는 여인들, 휴식을 즐기는 가족들. 그의 화폭엔 늘 누군가가 있었다. 함께하는 존재가 있었고, 그 존재들과의 순간은 언제나 소중했다.
《바닷가의 산책》도 마찬가지다. 그는 사랑하는 이들의 걸음걸이, 서로의 거리, 파라솔을 들고 앞을 걷는 아내의 어깨 너머 흐르는 햇살까지도 그리움과 사랑으로 가득 채웠다. 아무 말 없이 걷는 장면이 왜 이렇게 뭉클한 걸까? 아마도 우리는 알고 있다. 가장 소중한 순간은 언제나 조용히 지나간다는 것.
그는 어쩌면 말했을 것이다.
“지금 막 지나간 이 순간이,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삶의 빛이었다.”
어머니(1900). 딸을 출산한 아내를 그린 그림이다. 그림의 대부분은 흰 색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불의 포근함과 밝은 빛, 어머니와 그림을 그리는 소로야의 사랑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소로야는 자신이 사랑한 찰나들을, 가족과의 시간을, 삶의 아름다움을 붙잡고 싶은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슬픔이나 고난보다는, 존재하는 것의 아름다움에 집중한 화가였다. 그의 화폭은 세상의 고요한 기쁨으로 가득하다.
클로틸데는 단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삶을 지탱한 뿌리였다. 소로야가 세상을 떠난 뒤, 그녀는 남편의 유산을 보존하고자 소로야의 집과 작품을 스페인 정부에 기증했다. 그리고 그들의 집은 지금 ‘소로야 미술관’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랑의 흔적을 전하고 있다. 그것은 한 화가의 삶과 사랑이 담긴 공간이며, 우리가 잊고 지내는 삶의 순간의 소중함을 기억하게 해주는 장소다.
삶은 어쩌면 바닷가에서 걷는 것과 같다.
계속해서 흘러가지만, 그중 몇 걸음은 유독 선명하다.
햇살이 빛나고, 바람이 지나가고, 누군가 곁에 있는 순간.
그 찰나는 영원보다도 깊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놓치며 살아간다.
그러나 소로야는 말한다.
“놓치지 마. 지금 여기에 있는 이 순간을.”
그가 《바닷가의 산책》을 통해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바로 그것이다.
인생은 찰나의 연속이며, 사랑은 그 찰나를 함께 걷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그 순간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시선이야말로,
예술보다 더 예술적인 삶의 방식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