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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5년 그레이스로부터 온 편지 #28

2025 그레이스에게

by 두유진

그레이스,


편지를 쓰는 내 손끝이 이상하게 떨려. 너의 하루들이 얼마나 빽빽했는지, 그리고 그 빽빽함 속에서 네 심장이 얼마나 조용히 지치고 있는지 나는 알고 있어. 애플워치의 ‘소음주의’ 알람 소리가 울릴 때마다 너는 가슴속의 작은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듣고 있는 거야. 그 소리는 네가 더 쉬어도 된다고, 조금만 숨을 내려놓아도 된다고 말해주려는 신호였어.


먼저, 아주 담담한 사실을 말해줄게. 네가 지금 ‘교사로서 만랩’이라고 느끼는 건 진짜야. 너는 수십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는 능력과, 아이들 곁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끈기를 동시에 가진 사람이다. 그 능력은 사랑이기도 하고 책임감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네가 살아온 방식의 산물이다. 그러니 ‘다른 일을 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은 네가 가진 현실적 안전감의 표현이기도 해. 하지만 그 안전감이 곧 행복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우리는 함께 인정해야 해.


지금 네 상태를 ‘믹서기에 물 없이 갈리는 음식물’에 빗댄 표현을 읽으면서, 나는 네가 오랫동안 자기연료를 보충하지 못한 채로 계속해서 일을 해왔구나 싶었어. 믹서기는 계속 굉음을 내고 있고, 재료는 타들어가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할 일은 믹서기를 멈추고, 물 한 컵을 부어주는 거야. 물은 곧 쉬는 시간이고, 관심이고, 작고 규칙적인 보살핌이야.


몇 가지, 너에게 꼭 건네고 싶은 말과 제안이 있어.


쉬어도 괜찮다.

‘쉬는 것’은 게으름이 아니고, 도망이 아니다. 너의 전문성은 쉬는 동안에도 유지된다. 오히려 쉬면서 너는 더 깊게, 더 오래 설 수 있다. 하루에 10분이라도 완전히 다른 것을 하라. 창밖을 보거나, 아무 생각 없이 물을 끓이거나, 손으로 흙을 만지는 것. 그 10분이 네 믹서기에 들어갈 물이다.


행복감은 결과가 아니라 신호다.

지금의 무력감은 너에게 “이 지점에서 무언가를 바꿔야 한다”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박사과정을 시작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건 도망이 아니라 탐색이다. 학문은 네 호기심에 물을 주고, 교실 밖에서 네 정체성을 확인하게 해줄 수 있다. 작은 과목부터 시험 삼아 들어보자. 일단 ‘시험 삼아’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 큰 결정을 내리기 전에 경험을 통해 확신을 얻을 수 있다.


경계와 위임을 연습하라.

너는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려는 성향이 있다. 가끔은 ‘아직도 못하는 것’을 내보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학급 안팎에서 위임할 수 있는 일들을 목록으로 만들어 보자. 작은 것부터 남에게 맡겨 보라. 그 빈자리에 네가 좋아하는 일이,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들어올 수 있다.


너의 예술과 글쓰기를 회복의 도구로 써라.

네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건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네 안의 체온을 재는 방법이고, 네가 누구인지 다시 확인하는 방식이다. 하루에 한 문장, 한 색면이라도 남겨라. 그것이 나중에 큰 힘이 된다.


완벽을 포기하라 — 대신 친절을 택하라.

학생 앞에서의 너는 이미 충분히 좋은 교사다. 완벽함을 향한 쓸데없는 연료 소모를 멈추고, 친절과 일관성에 에너지를 쓰자. 너 자신에게도 같은 친절을 보내라.


마지막으로, 10년 뒤의 내가 전하고 싶은 가장 큰 진실을 말할게. 너는 이 길에서 ‘존재’로서 성장했다. 정년까지 서 있을 수 있는 건 능력 때문만이 아니라, 네가 매일 작은 연습(아이들을 듣고, 그림을 그리고, 문장을 쓰는 일)을 계속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건, 네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복이 항상 충만한 삶은 아니다. 다만, 소소한 순간들이 쌓여서 ‘살만한 삶’이 된다. 네가 그 소소한 순간들을 지켜주길 바란다.


오늘의 네 심장도, 지금의 네 작은 선택도 의미 있다. 믹서기를 멈추고 물을 붓는 것을 허락해줘. 나중에 보면 그 물이 너를 더 부드럽고 오래 돌아가게 해줄 거야.


언제나 너의 편이고, 너의 시간이 되어줄 2035 그레이스가 응원해. 그리고, 기억해. 이미 충분히 좋은 교사입니다.


2035년의 그레이스로 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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