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레이스,
십 년이 흐른 지금, 나는 네가 붙잡고 있던 질문 하나를 다시 꺼내 읽는다.
“나는 내 몸일까, 아니면 영성일까?”
그 물음은 오래도록 너를 괴롭혔지만, 동시에 너를 성장시켰다.
그 시절의 너는 늘 몸과 마음을 분리해 보려 했고, 때로는 네 몸을 어색한 동거인처럼 대하기도 했지. 하지만 도덕경의 구절은 늘 너를 멈춰 세우곤 했다.
“다섯 가지 색깔로 사람의 눈이 멀고,
다섯 가지 소리로 사람의 귀가 멀며,
다섯 가지 맛으로 사람의 입맛이 고약해진다.”
노자는 이미 오래전에 경고했어. 감각은 즐거움을 좇지만, 그 즐거움이 곧 고통의 씨앗이 된다고. 붓다가 말한 구불득고(求不得苦),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느끼는 고통과도 연결되지.
결국 인간이 감각에 집착하는 순간, 그 속에는 불만과 결핍이 자라난다.
너는 이런 구절을 읽고 종종 숨을 고르며 생각했지.
“내 몸은 단지 감각을 따라가는 그릇일까? 아니면 에너지를 머금은 집일까?”
감각과 집착의 고리
2020년대에 우리는 ‘비만 사회’라는 표현을 자주 들었다. 전문가들은 어린 시절부터 자극적인 음식에 노출된 아이들이 뇌의 보상 시스템을 지나치게 활성화시킨다고 말했지.
혀는 더 강한 맛을 요구하고, 뇌는 더 큰 쾌락을 찾는다. 그 결과, 건강한 음식에서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결국 다시 불건강한 음식으로 돌아가게 되는 악순환.
이는 단순히 음식 이야기만이 아니었다.
SNS의 화려한 이미지, 끊임없이 울리는 알림, 더 자극적인 관계와 더 눈부신 성취를 좇는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였어.
눈은 더 강렬한 빛깔에 길들여지고, 귀는 더 큰 소리에만 반응하며, 마음은 더 강한 자극 없이는 평온을 유지하지 못했다.
노자가 말한 “다섯 가지 색, 다섯 가지 소리, 다섯 가지 맛”은 곧 21세기의 우리 현실이었던 것 같아.
자극은 곧 피로로, 피로는 곧 공허로 이어졌지.
몸과 영성 사이에서
25년의 너는 몸을 친구로 대하겠다고 다짐했지.
못생긴 부분을 조롱하지 않고, 힘들어하면 위로하고, 잘못하면 다정히 타이르는 존재로 말이야. 그것은 도덕경이 말한 “몸을 소유하지 말고 다스리라”는 가르침과 닮아 있었다.
나는 이제 알게 됐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잠시 함께 사는 동행자(companion)라는 것을.
에너지가 이 세상에 잠시 머무는 동안, 몸은 그릇이자 집이 되어 준다.
그렇다고 영성이 몸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은 아니야. 몸과 영성은 서로의 거울이고, 서로의 그늘이 되어 준다.
너는 종종 거울 앞에서 이런 말을 속삭였지.
“내 몸아, 오늘도 수고했어.”
그 다정한 한마디가 사실은 영성이 몸을 향해 보내는 축복이었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안다.
부모와의 연결에 대하여
너는 부모와의 관계를 DNA를 나눈 특별한 연결이라 말했지.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삶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였어.
도덕경은 “만물은 제 갈 길을 간다”고 했다.
부모 역시 그 길 위에서 스스로의 도(道)를 살아간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길을 억지로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인정’하는 것이다.
십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더욱 확신한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흐름’이라는 것을.
너는 부모의 삶을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 했지. 그 순간 네 마음은 훨씬 더 평안해졌다.
비움 속에서 채움
도덕경은 “비움으로써 채운다”고 말한다.
그 말은 25년의 네가 늘 갈망하던 해답이기도 했다.
너는 너무 많이 알고 싶어 했고, 너무 많이 이루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인생은 ‘더 많은 답’을 쥐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비움 속에서 더 깊이 느끼는 것이었다.
오늘의 나는 네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삶을 ‘채우려는 애씀’보다 ‘비워내는 용기’를 가지라고.
그럴 때, 몸은 가벼워지고 영성은 빛나며, 관계는 얽매임이 아닌 자유가 된다.
10년 후 그레이스가 보내는 응원
그레이스,
너는 이미 충분히 현명해.
너는 이미 너의 몸과 영성 사이에서 작은 균형을 잡아내고 있었다.
네가 가볍게 웃고, 따뜻하게 쓰다듬는 그 순간이 바로 도덕경이 말한 무위의 길이다.
그러니 더 애쓰지 마라.
너를 괴롭히던 질문조차도 이제는 놓아도 된다.
네가 지금 숨을 고르고, 차 한 잔을 들고, 창밖 나무를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 그것이 곧 네가 찾던 답이다.
천천히, 그러나 단단히.
무겁게 소유하지 말고, 가볍게 사랑하며 살아가라.
늘 네 곁에서,
2035년의 그레이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