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보낸 강력한 거부권
책상 한구석
1월에 야심 차게 샀던 다이어리가 놓여 있습니다.
첫 몇 장은 형형색색의 펜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지만
3월의 페이지부터는 하얀 공백이 이어집니다.
그 빈 종이를 바라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 죄책감이 스며듭니다.
“나는 왜 끈기가 없을까.”
“역시 나는 안 되는 사람인가.”
우리는 멈춰버린 다이어리를 보며
실패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자신의 게으름이나 나약한 의지 탓으로 돌립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저는 현장에서 그리고 제 자신의 삶에서
수없이 많은 멈춘 다이어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펜을 놓은 그 순간은
의지가 꺾인 순간이 아니라
우리 안의 생명력이 “이대로는 안 돼”라고
소리친 순간이라는 것을요.
우리가 연초에 다이어리에 적어 내려가는 목표들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새벽 5시 기상
한 달에 책 5권 읽기
다이어트 5kg 감량
자격증 취득...
그 목록들은
과연 내가 진정으로 원해서 적은 것일까요?
아니면 세상이 말하는 갓생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나를 끼워 넣은 것일까요?
심리학적으로 볼 때 1월의 다이어리는 종종 이상적 자아의 전시장입니다. 현재의 나를 부정하고,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완벽한 나를 설계하는 과정이죠. 하지만 현실의 나는 그 높은 기준을 따라가기 위해 매일같이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합니다.
3월쯤 되면 우리의 뇌와 몸은 지치기 시작합니다.
내 것이 아닌 욕망을 좇느라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
즉 자아 고갈이 찾아옵니다.
이때 다이어리를 멈추는 행위는 게으름이 아닙니다.
“남의 인생을 사느라 나를 소진시키지 마”라는
내면의 아이가 보내는 구조 요청이자 강력한 무의식적 저항입니다.
자동차가 고속으로 달리다 엔진이 과열되면 시동이 꺼집니다. 그것은 고장이 아니라, 엔진이 터져버리는 것을 막기 위한 기계적 안전장치입니다.
우리의 무기력도 마찬가지입니다.
3월에 찾아오는 춘곤증처럼
혹은 갑자기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그 마음은
우리 몸이 켜는 생존 본능의 스위치입니다.
더 이상 타인의 속도에 맞춰 달리다가는 정말로
마음이 부서질 것 같기에 무의식이 강제로 시스템을 종료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이어리가 멈췄다면
자신을 비난하는 대신 안도해야 합니다.
‘아, 내 몸이 나를 지키려고 브레이크를 밟았구나.
내가 나를 잃어버리기 전에 멈춰 세웠구나.’
게으름이라고 착각했던 그 시간은
사실 가장 치열하게 나를 보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인생은 선이 아니라 점의 연속”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이어리가 매일매일 빈틈없이 채워져야 훌륭한 인생이라고 착각합니다. 선으로 이어진 삶만을 인정하려 하죠.
하지만
듬성듬성 비어 있는 페이지
쓰다가 멈춘 기록들 또한 당신의 삶입니다.
무언가를 성취한 날만 기록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날, 계획을 지키지 못해 속상해하던 날조차도 지금, 여기를 살아낸 당신의 찰나입니다.
이력서의 공백이 존재를 묻는 시간이었듯
다이어리의 공백은 완벽하지 않을 용기를 배우는 시간입니다.
빈 페이지를 죄책감 없이 바라보세요.
그 여백은
당신이 실패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당신이 기계가 아닌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빽빽한 계획표 대신
여유로운 숨구멍을 허락한
당신의 본능이 만들어낸 숨 쉴 공간입니다.
3월에 멈춘 다이어리를 굳이 4월에 다시 채우려 애쓰지 마세요. 억지로 이어서 쓰려다 보면 또다시 죄책감만 쌓일 뿐입니다.
대신, 다이어리의 빈 곳에 이렇게 적어보는 건 어떨까요?
“오늘은 나를 위해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았다.”
계획대로 살지 않아도
봄은 오고, 꽃은 핍니다.
세상의 속도가 아닌
내 호흡대로 살아도 삶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당신의 생존 본능이 선택한 그 멈춤을 믿어주세요.
그 멈춤 끝에
진짜 당신이 원하는 삶의 문장이 쓰이기 시작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