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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해받을 수 있다는 믿음

by 김마음


어느 주말 오후, 남편과 근교 드라이브를 가는 중이었다. 드라이브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병원 이야기가 이어졌다. 지난 진료에서는 무슨 대화를 했는지부터, 병원을 다니던 초반에는 어떤 생각이었고 지금은 또 어떤 생각인지, 그동안 어떤 것들을 배우고 느꼈는지 쭉 펼쳐보게 됐다.


그러다 문득, 내가 아직도 남편과 대화하지 못한 그 주제를 이제는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이제는, 이쯤이면 솔직해져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내가 선생님에게 감정적인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어느 날은 선생님이 이상적인 아버지의 모습으로 보이고, 또 어느 날은 이상적인 배우자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고. 치료적으로는 도움이 되는 부분이고, 전이 감정이라 부르는 내용이라고.


갑작스러운 나의 말에 놀랐을 법도 한데 남편은 당황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조금은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단다. 병원 가는 날 유독 신경 쓰는 모습이며, 병원에 다녀온 뒤 선생님 얘기를 끊임없이 털어놓는 모습이며, 이상한 일 투성이었다고. 처음에는 도대체 뭘까 궁금하고, 어떻게 물어봐야 할까 고민했는데, 책을 보고 알게 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 시도를 했던 2024년 12월, 상담 선생님께서 '소중한 사람에게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라는 책을 소개해주셨는데, 그 책에 전이 감정에 대한 내용이 있었단다. 그 부분을 읽고는 나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아 마음이에게 지금 그런 감정이 있는 거구나' 생각했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


놀랐다.


전이 감정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에도 놀랐고, 남편이 그동안 나를 배려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항상 '남편은 나를 이해하지 못해, 변할 수 없는 사람이야'라고 단정 짓고 있던 나였는데, 남편은 생각보다 훨씬 오랫동안 나를 지켜보며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부끄럽고, 고마웠다. 이 사람은 나를 위해 이렇게나 노력하고 있었구나. 오히려 눈치채지 못한 채 투정을 부리고 있는 사람은 나였다.


나의 병과 증상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면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화가 났을 수도 있고,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그 어떤 감정보다도 나에 대한 걱정이 먼저였다. 우리는 그 뒤로도 이 주제에 대해 여러 번 대화를 나눴다. 털어놓고 나니 한결 가벼워졌다. 숨길 것이 없어졌다는 게 기분을 후련하게 했다. 남편과의 관계도 전보다 많이 돈독해진 느낌이었다.


이후 진료실에서 남편이 알고 있었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선생님도 내가 많이 배려받고 있었다는 점을 짚어주셨고, 전에 하셨던 말씀을 하나 덧붙이셨다.


"언젠가 제가 그런 얘기한 적 있죠. 여기 와서 이해받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다 얘기해 주기 때문인 것도 있는 것 같다고. 남편분께는 그런 기회를 안 주고 계신 것 같다고. 얘기를 잘 안 했잖아요. 그간에 실망했던 몇 번의 경험들 때문에. 근데 이번에 얘기가 나와서 해보니까 어땠나요? 잘 받아주시는 것 같은데요?"


- "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거든요. 근데 본인도 많이 달라지려고 노력을 했대요. 제가 그런 얘기를 한 적 있었거든요. 당신이 거칠거나 한 사람은 아닌데, 섬세하지 않고 가끔 조금 투박하게도 느껴진다고. 본인도 인정하더라고요. 그래서 변해보려 노력했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대요."


"이것도 어떻게 보면 겁냈던 부분 중 하나잖아요. 아마 이해받지 못할 거야 했던 것. 물론 이해받지 못할 수도 있어요. 배경 지식이 없었더라면. 근데 남편분은 그 노력을 하고 계셨네요, 이해하기 위해서. 내가 용기를 내서 가봐야, 그래야 어떤지를 알 수 있어요. 아마 얘기를 안 꺼냈다면 계속 몰랐겠죠. 얘기해 보니까 조금 맘이 편해지지 않았나요?"


- "편해졌어요."


편해졌다. 이런 대화가 있기 전에는 집도 나에게 무서운 공간이었다.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고, 노심초사했다. 그날의 대화는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집이 더 이상 숨기고 피해야 할 공간이 아니라, 내가 솔직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라는 것을 느꼈다. 믿고 말해도 되는 사람, 내가 기대도 되는 사람, 나의 짐을 나눠 들어줄 수 있는 사람. 사소한 대화의 시작이 많은 걸 바뀌게 했다. 나의 마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관계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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