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 민주화운동 무렵, 5월 초에 대학가에는 반독재 시위가 그치지 않았다.
나는 친구들에게 대충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을 수는 있었지만 솔직히 분연히 나서 투쟁을 할 용기는 전혀 없었다. 그저 친구들이 분개하는 모습을 보며 맞장구를 치는 정도였고, 내가 무언가 역할을 해야겠다는 의지를 가진 적도 없었다.
그러다가 5월 15일 경, 학교 정문 부근에서 시작된 시위가 갑자기 커지기 시작했고 하늘에는 최루탄이 불꽃처럼 날아다니고 학생들은 돌맹이건 뭐건 손에 잡히는 대로 전경 쪽을 향하여 던지기 시작했다.
최루탄의 위력을 제대로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보온밥통같이 생긴 최루탄이 바닥에 떨어지자 노란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숨을 들이쉬는 순간, 하늘이 노래지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도 돌을 집어던지며 정신없이 정문 쪽으로 뛰어갔다.
조금 후에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양쪽에 있는 학생들과 팔짱을 단단히 끼고 시위대의 앞쪽에 서 있었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무려 앞에서 세 번째 줄에 내가 서 있었던 것이다.
머릿속에는 정의감이나 투쟁의 의지는 전혀 없었고 공포심만 가득했던 것 같다. 그러나 뒤에서는 수천 명의 학생들이 전경들의 저지선을 뚫으려고 밀어붙이고 있었고, 앞에서는 방패로 무장한 전경들이 사정없이 방패와 곤봉을 휘두르고 있어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앞의 두 줄이 사라졌다. 전경들의 틈 사이로 저지선이 잠깐 뚫렸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앞에 있던 학생들이 앞으로 뛰쳐나갔던 것 같다.
갑자기 나는 맨 앞에 서게 되었고 뒤에 있는 학생들은 저지선을 완전히 무너뜨리려고 더욱 세차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얼굴에 큰 충격이 느껴졌다. 내 양팔은 옆에 있던 학생들이 꽉 잡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고, 그 상태에서 뒤에서 사정없이 밀어 대니 그만 앞으로 밀려가면서 방패에 얼굴을 부딪힌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전경들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공포심은 더욱 커졌고 나는 전경들을 밀쳐내고 정신없이 골목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발소가 보였고 무조건 그리로 뛰어 들어갔다. 이발소 안에는 이미 학생들이 여러 명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도 공포와 분노, 어찌할 수 없는 좌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서로의 얼굴을 차분히 관찰할 수 있었다면 아마 다 비슷해 보였을 것이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대기할 때 앉아 기다리는 소파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나는 할 수 없이 이발할 때 사용하는 의자에 앉을 수밖에 없었고 어떻게 든 상황을 정리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조금 있다가 두 명의 형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험악하게 생긴 그중 한 명이 소파에 앉아있는 학생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나오라고 소리를 쳤다. 밖에는 이른바 닭장차가 학생들을 데려가려고 시동을 건 채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 이발소 아저씨가 내 머리를 깎는 척,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해 주었고 나는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본 그 형사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 형사는 내가 시위에 참여했다가 도망 온 학생임을 아는 눈치였다. 잠깐의 갈등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고 곧바로 그는 나를 외면하곤 이발소 문을 닫고 떠나갔다.
방패에 부딪힌 광대뼈에서 피가 그치지 않아 나는 집으로 발길을 향했다. 어머니께서는 걱정하셨고 다시는 그런 시위에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다.
다음 날 다시 학교를 갔다. 시위에 다시 참여해야 하는지 결심은 서지 않았지만 어쩐지 학교에는 가 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같은 과 친구들은 내가 전경들에게 끌려간 줄 알고 있었다. 내가 피를 흘리며 어디론가 뛰어가는 모습을 본 친구가 있었고, 그 뒤로 연락이 닿지를 않으니 당연히 전경버스에 실려 간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 서울시청 근처에서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도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나도 그 자리에 또다시 합류하였다. 시청 근처 골목을 이리저리 쫓기며 도망치던 기억밖에 없지만 적어도 그 날 저녁에는 내 안에서 뜨거운 피가 맹렬히 끓어올랐던 것 같다.
이것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위의 추억이다.
그 대규모 시위 이후, 전국의 모든 대학에는 곧바로 휴교령이 내려졌고, 몇달 동안 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지금도 그때 그 형사가 가끔씩 생각난다. 나에게는 그가 형사라는 직업과 위로부터의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학생들을 붙잡아 갔지만, 그래도 자기가 할 수 있을 때 잠깐씩 외면해 주는 정의감을 발휘했던, 소심한 정의의 투사로 생각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