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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nsee Nov 29. 2019

가훈

큰 아이가 초등학생일 때 숙제라고 하면서 우리 집 가훈을 물어왔다. 내 생각에는 선생님이 가훈을 알고 싶어서 내 준 숙제라기보다는 대부분의 집에 가훈이 없을 테니 이번 기회에 부모와 아이가 둘러앉아 오손도손 가훈을 만들어보라고 숙제를 내 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우리 집에도 그때까지는 가훈이 없었고 마침 평소에 생각해 둔 것이 있어 ‘웃으며 죽자’라는 문구를 가훈으로 삼자고 아내에게 얘기해 보았다.

그랬더니 예상보다 훨씬 심한 반발이 돌아왔다. 애들 앞에서 죽자라는 흉측한 소리를 하느냐고…


그래서 차분히 설명을 해 주었다.

죽는 순간에 서운함도, 미안함도, 아쉬움도 없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이 세상을 하직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알차고 보람 있는 인생이 어디 있겠느냐고… 사는 동안 맘속에 품고 있었던 오만가지 한과 화를 다 정리하고 미안한 사람도, 저주를 퍼부을 사람도 없이 웃으면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그랬더니 수긍은 하면서도 그래도 숙제로 제출하기에는 좀 그렇다고 하여 할 수 없이 ‘웃으며 살자’로 가훈을 적어가라고 하였다.


반백년을 넘어 살다 보니 부끄러워 다시는 못 볼 사람, 생각만 하여도 울화가 치미는 사람, 맘의 빚을 평생 못 갚을 고마운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는 것 같다.

예전에 어느 간호사가 쓴 짤막한 글에서 읽은 어떤 분이 생각난다.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고 나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몇 달 동안 매일같이 한 사람씩 병원으로 불러 사과해야 할 사람에게는 미안하단 말을, 자기에게 잘 못한 사람에게는 용서의 말을 전하고, 고마운 이에게는 정성이 담긴 작은 선물을 전하고 아주 편안하게 돌아가셨다는 분…


내 경우는 그분같이 삶을 마무리하려면 몇 년이 걸려도 힘들 거라는 생각은 들지만 가능하다면 흉내라도 내고 싶은 맘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죽음을 앞두고 혼자서 차분히 자신의 인생을 회고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어차피 삶이란 다른 사람들과 관계의 연속이니 죽음의 순간에 인연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러다가도 죽음을 앞두고 그런 노력을 한꺼번에 몰아서 하는 것이 썩 좋게 생각되는 것은 아니어서 차라리 ‘웃으며 잠자리에 들자’를 가훈으로 정해 볼까 혼자 생각해 보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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