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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별펭귄 Jun 03. 2024

극과 극에서 사색하는 펭귄

   



물성을 지닌 채

담담히 자리를 지키는

과거의 기억들




 글쓰기는 정말 신기하다. 진득거리는 껌처럼 평생을 내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과거의 기억들이 자연스레 잊혀지는 시간들이 늘었다. 이것이 바로 글이 가진 힘일까. 글쓴 내용들이 내 기억에서 자연스레 떨어져 나와 물성을 지니고 그 자리에 담담히 서 있는 듯하다.


 나의 아팠던 과거들을 글로 적을 수 있는 용기가 있음에 감사하다. 슬픈 기억들을 뒤에 담담히 묻어놓고 지금 이 순간들을 살게 되어 감사하다. 많은 사람들의 위로를 받을 수 있어 감사하다.


 다만 그 모든 기억들이 아무리 물성을 지니고 활자를 지니고 자리하고 있다 할지라도, 다시 들춰볼 용기가 나지 않는 건 여전하다. 이마저도 시간이 흘러가는 세월이 무뎌지게 해주겠지 담담히 생각해본다.





 한편 나에게는 상처만 있지 않다. 남들에게 내보이기엔 너무 진지한 모습들, 부끄러운 모습들도 존재한다. 나는 대단한 사람이 전혀 아니다. 나에게도 분명 약점들이 열등감들이 무너진 자존감들이 여기저기 똘똘 뭉쳐져 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이 모든 약점들, 열등감들, 패배감들을 못 본 척, 없는 척 하게 만든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럴 수 없다. 나는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인간이 되고만 싶다.  


 그렇게 내 약점마저도 털어놓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온다. 아마 내게는 지금이 그 순간인 것 같다. 매번 느끼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글을 쓴다는 건 정말이지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글쓰기는 기쁨이자 환희이다. 한없이 부끄럽지만 부끄러움을 이겨낼 용기를 준다. 내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극과 극의

펭귄





 나는 모 아니면 도인 인간이었다. 좋으면 좋은 것, 싫으면 싫은 것이었다. 호불호가 분명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고집도 세다. 흑백 논리의 색안경을 쓰고 삶 대부분을 바라보았다. 극과 극을 살았다.


 공부도 내가 좋아하는 것은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과목은 저 밑바닥의 점수를 내달렸다. 내가 좋아하는 일은 신이 나 뚝딱 처리해버린다. 심지어 창의성을 발휘해 더 나은 해결방안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싫어하는 일은 어떻게서든 마감까지 질질 끌다가 겨우겨우 자신을 독려하며 마무리하곤 했다.


 사람에게도 그랬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퍼주고 배려하고 아낌없는 사랑을 주지만 일단 나의 마음에서 벗어난 사람에게는 사람간의 예의는 지키되 척을 지고 살았다.


 지금은 사회에 이리저리 치이고 쓸려서 나의 극단성은 마모되고 조금은 뭉툭해졌다.  '좋은 게 좋은거지', '모두에게는 각자 장단점이 있는걸.' 같은 이런저런 마음으로 극단적 성향을 조금 내려놓았다.


 그럼에도 나는 부끄럽지만 여전히 조금은 극단적인 성향의 사람이다.




 나는 왜 극단적인 인간이 되었을까. 깊이 고민하고 생각한 답을 내놓는다. 나름의 이유를 붙여 변명해보자면 그건 내 나름대로 이해되지 않는 세상을 이해해 보려는, 모순투성이인 험난한 세상 속에서 조금이라도 내 자리를 잡고 살아가 보려는 소시민1의 안간힘이자 발버둥이었다.


 세상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분법적인 작대기가 필요했다. 삶과 죽음, 선과 악, 밝은 것(明)과 어두운 것(暗),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 맑은 것과 혼탁한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법과 위법, 죄와 죄가 아닌 것, 군자와 소인,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 나는 그렇게 조금 더 쉽게 세상을 바라보길 원했다. 어떤 삶의 지침이 있기를 바랐다.


그렇게 나는 닿지 못할 이상(理想)을 추구하기도 했다. 극한의 선(善)을 꿈꾸었고, 극단적으로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살았다.





 문득 고개를 빼꼼 내미는 억하심정에 글을 쓰다 말곤 입을 삐죽인다. 아니 애초에 어렸을 때부터 우리 사회가 그렇게 가르쳐 주지 않았나, 어린시절부터 본 모든 문제에는 답이 늘 정해져 있었다. 정답과 정답이 아닌 것. 늘 2가지 뿐이었다.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기독교 모태신앙으로 자랐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은 늘 말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 죄를 지으면 안된다, 우리는 언제나 회개하고 천국에 가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 말을 들은 꼬맹이는 어떻게 생각할까. 당연히 죄를 짓지 않고 선하게 올곧게 살아서 천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게 나는 죄를 짓지 않아 보려고 아둥바둥했다. 신의 사랑을 널리널리 전하는, 선한 사람이 되기를 늘 바라고 꿈꿔왔다.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인간의 원죄는 대단했다. 나는 여전히 죄를 짓고 또 짓는 인간이었다. 부모님과 선생님 말씀을 듣지 않는다거나 학원을 빼먹는다거나, 친구들과 때로는 동생과 싸우거나, 잘 나가는 누군가를 시기 질투한다거나, 기분에 따라 욕을 한다거나, 속으로 오만 가지 나쁜 생각을 하고 또 하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인간이었다.





 나는 스스로가 죄를 지었음을 자각하면 그 순간부터 끊임없이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회개기도를 하고 또 했다. 하지만 회개가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가까이 반복되다 보면 자연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죄악으로 가득한 내가 과연 변하긴 하는 걸까요? 저는 애초부터 글러먹은 인간은 아니었을까요? 나는 결국 천국에 가지 못하게 되는 걸까요? 인간에게는 과연 답이 있을까요?


 나는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다. 나는 태생부터 글러먹은 죄인인 것 같다고, 나도 당신의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 맞기는 한 것이냐고 묻고 또 물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모진 말들을 서슴없이 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반복했다.


 




 나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 시인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역시 인생은 비극이자 고통이 맞았다.


 세상은 이해되지 않는 모순 투성이다. 동그라미와 엑스, 두 가지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선가 느닷없이 세모가 자꾸만 튀어나온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도덕적 명제이자 성경에도 각종 경전에도 써 있다. 그런데 선한 거짓말, 하얀 거짓말이 있단다. 그렇다면 거짓말이 좋을 때도 있는 것인가. 그래서 거짓말을 하라는 것인가 말라는 것인가.






 사람은 또 어떤가. 착한 사람, 나쁜 사람만 있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은 마냥 선하지도 않고 마냥 악하지도 않다. 나 스스로의 모순적인 모습에서도 느낀다. 나는 마냥 착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 그럼 나란 사람은 도대체 무엇일까. 사람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 것일까. ― 나는 좋게 말하면 철학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내 안의 생각 미로에 갇혀 아둥바둥거리는 인간이었다. ―


('이 모든 게 무슨 개가 왈왈하고 짖는 소리지?' 라고 들릴 분들에게는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내 자존감은 그렇게 서서히 낮아졌다. 나는 선(善)에 부합하고 싶은데 역사 속 위인들처럼 선하게 남들에게 세상에 도움을 주며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고집을 꺾지도 못했다. 양 극단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했다.






 누구나 옳다고 하는 진리가 있는데 왜 나도, 사람들도 그렇게 살지 않을까. 사람들은 왜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걸까. 그저 다들 행복하게 웃으며 살면 안되는 것일까. 뉴스는 언제나 그랬듯 좋지 않은 소식들을 실어다 나를 것이 뻔하지 않나. 지금도 세상에는 전쟁과 폭력이 끊이지 않고 벌어지지 않는가.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모순덩어리이자 답답함 그 자체였다. 그래서 나는 세상이 너무 어려웠고 미지의 세계였고 너무도 알고 싶었다. 그래서 탐구했다. 성경도 읽고, 공자왈 맹자왈 글들도 읽고, 철학 그리고 인간의 실존을 다룬 강의도 듣고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 칸트 등등 철학 서적들도 읽었다.



―.



 하지만 나는 끝내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채찍만을 주구장창 가하다가 이제 채찍질을 할 힘마저 사라진 비실비실한 사람이 되었다.






극(極)을 항해,

극(極)을 향해





 한편 어른이 되고 먹고 살기에 바빠 사색의 시간이 줄어드니 자연스레 고민들은 덜해졌다. 그럼에도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극단적인 성깔들에 놀라기도 하고, 이따금씩 습관처럼 반복되는 철학적 고민들에 침잠하기도 한다.





 읽고 또 읽으며, 쓰고 또 쓰며 조금씩 깨닫는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신만의 짐을, 스스로만이 지고 갈 수 있는 짐을 지고 살아간다고. 그리고 나 혼자서만 그런 고민과 성찰들에 힘겨워 한 것은 아니라고. 수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했고 희구하던 그 모든 것들은 언젠가 저마다의 정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나만 그렇게 생각하진 않은 것 같아서, 다른 누군가 역시도 삶에서 마주하는 모순과 물음들에 치열하게 고민하고 해답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에 위로와 공감을 얻는다.




 여전히 그 물음들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지만 나의 치열한 고민의 흔적들이 헛되지 않기를, 적어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스스로에 대한 자책은 조금 덜어내기를, 세상을 더 맑은 눈으로 바라보기를 바란다.

 

(쓰다보니 한없이 재미없고 진지한, 철학적인 사색의 글이 되어버렸다. 따흑. 그럼에도 속으로 수십 번, 수백 번 고민하던 것들을 꺼내놓아 후련하다.)





 물론 세상사에는 속 시원히 답을 내릴 수 없는 것도 있음을 느낌으로 감각한다. 여전히 나는 그 답을 모를테고 때로는 극단적으로 살아가겠지만은 그럼에도 언제나 나 스스로이길 바라본다.


그리고 나의 극단성이 장점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바란다.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눈물을 주는 극단성으로 가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언젠가 내가 마주할 그 끝에는 따뜻함과 평온함이 있었으면 좋겠다. 사람을 향한, 세상을 향한 사랑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By. 민트별펭귄.


사진 출처 : pixabay

본문 출처 : 민트별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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