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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별펭귄 Jun 19. 2024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책 리뷰]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다산책방)



책이 가벼웠다. 제목도 작고 사소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책을 가볍게 집어 들고는 자리에 앉아 책장을 넘겼다. 첫머리를 읽기 시작했다.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소설의 첫 문장을 읽었다. 알 수 없는 가을의 씁쓸함과 둔탁한 무거움이 턱 내려앉았다. 묘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 책이 쉽게 읽히진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를 스산하고 둔중한 느낌이 나를 내리누른다. 





 역시나 책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평상시라면 휘릭 휘리릭 책장을 넘겼을 터였다. 그러나 나의 손은 책 너머에서 이곳으로 불어오는 연말의 매서운 바람에 굳어지고 둔해졌다. 믿기지 않지만 그렇다고 느꼈다. 생각의 수면 아래로 꾸역꾸역 억눌러 놨던 사념들이 하나 둘 물 위로 둥 둥 떠올랐다. 


검고 짙푸른 강에 구멍이 송송 뚫린, 바스러져 제 흔적을 알아보기도 힘든 낙엽이 둥둥 떠내려간다.





 주인공 펄롱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한 사내다. 석탄과 목재를 배달하는 일을 업으로 하루하루를 먹고 살아간다. 때로는 자신보다 형편이 어려운 이웃에게 잔돈을 받지 않고, 때로는 추운 겨울을 나기 힘든 이웃과 자신의 목재 더미를 나누며 살아간다. 


 생각이 많은 주인공 아저씨, 펄롱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펄롱'이라는 활자 위로 나 자신의 모습이 겹쳐진다. 세상을 살며 한번쯤 해보던 생각들이 내 눈앞에 흑과 백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 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다음 단계, 그다음 단계, 또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순행적 흐름. 시간은 흐르고 흘러도 거꾸로 가지는 않는다. 


삶이란 시간이 가는 방향에 그저 몸을 맡기고 순응하는 것일까. 아니면 일정하고 거센 흐름 속에서도 뿌리를 단단히 박고 피어나는 연꽃처럼 단단히 버티고 굳세게 서 있어야 하는 걸까. 





삶에서
그토록 많은 부분이
 
운에 따라
결정된다는 게
 
그럴 만하면서도
동시에
심히 부당하게 느껴졌다.



 삶이란 무엇일까. 하루하루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렵고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나와 고만고만하니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도 있고 돈도 잘 벌고 나가는 사람도 있는 세상이다. 세상에 운은 존재한다. 


 나라고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나. 한 번씩 억울할 때면, 울분에 찰 때면, 화가 날 때면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이 시대, 이 나라, 이 지역, 이 순간에 이 가족들, 이 친구들을 만나고 이 사람들을 만나고 이 직업을 택하고 산다는 것이 순전히 나의 선택 때문이었을까. 아니 그것엔 분명 운도 작용했다. 그렇다면 운은 정당한가. 그렇다고 운은 부당한가. 


 작가는 한 문장 한 문장 툭 툭 적고 내뱉었을 뿐인데 그 한 문장 한 문장 안에 있는 함의는 깊고도 넓었다.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나 역시 펄롱과 비슷한 사념들을 갖고 살던 인간이었다. 펄롱과 같이 작고 사소한 고민들에 밤잠 못 이루던 사람이다. 


 펄롱은 생각한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을 생각한다. 역시 그랬다. 나는 생각한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을 생각한다.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부당한 일에, 있어서는 안 될 일들에 원통해하고 가슴 아파했다. 때론 이게 말이 되는 일이냐며 언성을 높이고 울기도 했다. 


 문득 내 작은 두 손을 내려다봤다. 내게는 권력도 힘도 돈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가진 전부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펄롱보다 못한 인간이었다. 





 나는 소시민을 자처했다. 나는 역시 소시민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 나의 주변에 집중하여 살았다.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주고받는다. 미소도 도움도 작은 선물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했다. 


 때로는 봐도 못 본 척했다. 운명이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흐름이다 그렇게 여겼다. 순간만은 괜찮겠지 흐리멍텅하니 넘겨버렸다. 


 사소한 것들은 나를 일으켜 세웠고 무너뜨리며 다시금 일으켜 세웠다. 





 어느 순간 어른이 되고 일상의 쳇바퀴를 돌리고 돌리며 양심도 마음도 무뎌지고 둔해졌다. 소시민의 마음은 평범해졌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희뿌연 성에가 낀 마음을 입김을 호 ― 불어 뽀득뽀득 닦아냈다. 둔해진 마음을 이리 삐죽 저리 빼죽 깎아냈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길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작은 소녀에게 펄롱의 손길은 전혀 사소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작지만 컸다. 


 펄롱이 마주할 최악의 상황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아이들의 부당함이, 소녀들의 억울함이 세상에 드러났다. 사람들은 진정한 실상을 알게 되었다. 





 나는 또다시 사소한 것들로 채워진 순간들을 살 것이다. 내 일상이 막 크게 변하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할 수 있었는 데 하지 않은 일은 없도록 살고 싶다. 


사소하지만 너무 작고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럼에도 사소한 것들의 힘을 믿는다. 나의 사소한 글들도 모이고 모여 누군가에게는 가장 밝고 빛나는 별이 되기를 바라고 바라본다. 

 





By. 민트별펭귄.


사진 출처 : pixabay

인용 출처 :『이처럼 사소한 것들』클레어 키건, 다산책방

본문 출처 : 민트별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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