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어린시절 읽었던 책들을 어른이 되어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어른이 되어 다시 『데미안』을 읽어보았다. 다 읽자마자 그 어린시절의 나는 이 상징들과 심도 깊은 언어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싶었다. 그만큼 지금의 내게도 많은 부분들이 어려웠다.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은유들도 많았다.
어렸을 때 나는 나무보다는 숲을 위주로 책을 보았다. 의미를 파악하며 차분히 읽기보다는 이해가 되었다 싶으면 바로바로 넘어가는 속독으로 책을 읽었다. 질보단 양으로 책을 보았다. 다만 그당시의 나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살아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난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다. 단 한 문장이라도 그 구절을 쓰기 위해 작가가 공들인 노력을 조금은 알 수 있게 된 나이다. 따라서 그만큼 책을 좀 더 음미하며 볼 수 있게 된 듯하다. 책 속 문장들에 감명을 받고 필사를 하기도 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구절을 여러 번 혀 마디에 굴려 묵독하기도 했다. 다만 지금의 나는 주어진 현실을 너무도 잘 알고 두 세계를 모두 알아버린 '내 자신'이 있다.
그 두 간극에서 오는 감상의 차이는 꽤 컸다.
내가 처음 『데미안』을 접한 건 중학교 2학년 때쯤일 것이다. 중2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나 역시도 반항심과 호기심이 왕성한 때였다.
당시 나는 부모님과의 마찰이 잦았다. 부모님의 꾸지람에 말대꾸를 하고, 가볍다면 가벼웠을 거짓말을 하고, 통금시간을 어기거나 부모님 말씀을 거역하는 것들 등 매일같이 혼이 났다. 어려서부터 모태신앙이었던 나는 매일 죄를 짓고 끊임없이 회계기도를 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 당시 어린 아이의 죄책감은 세상 그 무엇보다 큰 것이었다. 두 세계가 있었다. 나는 끊임없이 두 세계를 오가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혼란은 마치 프란츠 크로머처럼 다가왔다. 매일 같이 하는 회계기도가 도통 소용이 있나 허탈하면서도 끊임없이 빠져드는 죄책감과 자괴감에 더더욱 침잠했다.
중학생인 나는 싱클레어에게 깊이 공감했다. 싱클레어는 나의 대변자였다. 마음속에서 표현되지 못하고 응어리진 말들을 책의 문장으로 대신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고난 속에 있던 싱클레어를 도와준 것은 다름 아닌 데미안이었다. 나에게 위로가 되어 준 친구 역시 『데미안』이었다.
그렇게 난 데미안의 진지함, 어른다운 모습에 끌렸다. 데미안처럼 되고 싶었다.
어떤 짐승이나 사람이
자신의 모든 주의력과 모든 의지를
어떤 특정한 일로 향하게 하면,
그는 그것에 도달하기도 하지.
그게 전부야.
···
어떤 사람을 충분히 자세히 바라봐.
그에 대해서 그 자신보다
네가 더 잘 알게 돼.
며칠 가진 못했지만 한동안 말수가 줄고 어른스러움을 가장한 차분함을 유지했다. 한편으로는 데미안이 책 속에서 말한 <독심술>이 사실인지 직접 실험해보기도 했다. 나름대로의 그당시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선생님의 눈을 빤히 바라보는 것이다. 몇 번의 실패를 거쳐-앞선 소망들은 생각보다 덜 간절했었던 모양이다- 결국 성공했을 땐 내가 마치 데미안이 된 것 마냥 자만심에 도취되기도 했다.
책의 뒷부분에 가서는 어느 순간 이해를 포기하고 사랑과 평화 얘기겠거니 대중 짐작하며 얼레벌레 읽어버리고 말았다. 문자 그대로 읽어서인지 에바부인 부분에서는 무슨 이런 사랑이 있지 싶기도 했었다. 그래서 뒷 부분에 대한 기억은 지금의 내게 거의 남아있지 않다. 피스토리우스, 크나우어 등은 거의 초면인 듯했다.
결국 나의 데미안 되기 프로젝트는 깔끔히 실패했다. 그렇게 이 책은 잊혀졌다.
비록 원하던 데미안은 되지 못했지만 지금의 나는 알을 조금은 깨고 나와 세상을 보는, 날지 못하는 새, 펭귄 정도 되었다.
어른이 되어 사회에 충분히 찌든 지금, 차분히 책을 다시 읽다보니 보이는 구절들과 마음 속 심상이 이전과는 또 달랐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멋도 모르고 이 책을 보고 있던 어린 날의 모습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 당시 데미안 하면 누구든 말할 수 있는 구절이 바로 저 문장이었다. 중2병의 나는 저 문장을 하도 많이 들어 식상하고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왜 사람들이 그렇게 마르고 닳도록 말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나는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투쟁의 삶을 겪어왔고 앞으로도 겪을 것이다. 알은 세계이다. 나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는 중이다.
책을 읽은 2번의 경험 동안 느낀 공통의 감정은 다름 아닌 위로와 공감이었다.
자신을 남들과 비교해서는 안 돼.
자연이 자네를 박쥐로 만들어놓았다면,
자신을 타조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 돼.
더러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자신을 나무라지.
그런 나무람을 그만두어야 하네.
위 문장 뿐만 아니라 책 곳곳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작가의 사랑을 느꼈다. 자아를 비롯한 세상의 혼란 속에서도 그 안에는 위로와 공감하는 마음이 듬뿍 담겨 있었다. 앞서 밝혔듯 이 이야기는 작가 본인의 이야기다. 싱클레어가 느끼고 고민한 흔적들 역시 대부분은 작가 본인 스스로 자라며 보고 느꼈을 , 진정어린 사랑과 존중의 마음들이었다.
한편 작가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이 눈에 들어왔다. 작가의 삶에는 참혹한 전쟁이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사랑과 평화를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저자가 바라본 신유럽은 종말이었다. 변화되어야 할 세계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전쟁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자연에서 던진 돌들은 서로를 비교하며 진정한 연대를 이루지 못한다. 작가가 꿈꾸던 자유와 사랑의 세상이 아직은 멀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시리게 아려왔다.
한편 베아트리체와 에바부인과 관련한 많은 상징들을 다시금 눈여겨보게 되었다.
내가 이해한 싱클레어의 그림은 그 자신이자 데미안, 에바부인, 신 압락사스, 그 모든 전부이다. 활자 그대로 본다면 친구의 어머니를 사랑한다는 것은 여전히 나의 상식선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의 상징을 이렇게 이해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선의 세계에 속한다. 친구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은 반대편 세계에 가까운 것이다. 그 모든 세계를 품고 있던 것이 에바부인으로 형상화되어 우리에게 자유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말이다.
도중에 길을 헤메던 싱클레어에게 조언을 해주었던 피스토리우스 또한 인상깊었다. 오르간을 연주하던 그, 첫 수업으로 함께 불멍을 보아준 그 역시 자연이 던진 돌이었다. 그와의 헤어짐은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데미안은 여전히 그의 운명을 꼿꼿히 걸어갔다.
데미안은 피스토리우스를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결국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저자 말대로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나 역시 데미안과 피스토리우스의 해석을 따라가지 않는다. 나는 나의 시선으로 데미안을 해석한다.
책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변화된 건 책을 바라보는 내 자신의 모습이었다. 다음 십여 년 뒤에는 책을 읽고 어떤 감상을 느낄지 궁금해진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만한 존재이다.
By. 민트별펭귄.
사진 출처 : pixabay
인용 출처 : 『데미안』 헤르만 헤세, 민음사
본문 출처 : 민트별펭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