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수용
수영을 함에 있어 필요한 것은 수용이다. 나의 몸을 수용하고 있는 그대로 물에 띄우는 것. 수영을 시작하고 샤워실에서 사람들을 보면서 처음으로 느껴본 묘한 느낌이 있었다. 우리가 사람들의 알몸을 한가득 보는 가장 흔한 장면은 목욕탕일 것이다. 지금은 대중목욕탕이 그다지 인기 있지 않지만, 내가 어린 시절엔 목욕탕 방문은 월례 행사요, 명절 전 준비절차 중 필수적인 코스였다. 살갗이 벗겨져라 때를 밀어주던 엄마, 헤어팩이라고 거짓말하고 내 머리에 마요네즈를 잔뜩 버무려 헤어캡을 씌워놓았던 엄마와 엄마 친구 사기단, 크게 넘어져서 다칠 뻔한 기억, 목욕하고 나와 마시는 바나나 단지우유까지 우리 동네 성심목욕탕에 대한 추억이 남아있다. 그 시절 남의 몸을 본 기억은 별로 없다. 어렸을 때였고, 할머니들도 많았고, 스스로도 남의 몸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수영장 샤워실에서 사람들이 샤워를 하고 수영복을 갈아입는 모습을 보면서 상당히 묘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뭐 때문에 드는 느낌인지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수영장 샤워실에는 스스로 자기 몸으로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만 있다. 아동 라커룸은 따로 있어서인지, 성인 여성 샤워실에는 자기 몸을 스스로 이끌고 수영을 배우러 온 사람들만 있다. 각자 자신의 힘으로 몸을 씻고 자신의 힘으로 수영복을 입고 꼿꼿하든 구부정하든 자신의 걸음으로 다른 보조 없이 수영장으로 걸어 나간다.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무척 멋있는 장면이다. 목욕탕처럼 말 안 듣는 아이를 데려와 통제에 애를 먹는 장면도 없고,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을 모시고 와서 목욕을 도와드리는 장면도 없다. 수영장 샤워실에서 다들 묵묵하게 해야 할 일을 하고, 간혹 아는 얼굴을 만나면 소소하게 인사도 나누면서 수영 준비와 수영 마무리를 한다. 목욕 자체가 목적은 아니기 때문에 샤워실은 수영의 전후 단계에서 기능한다. 수영장 샤워실의 담백한 목적과 이용자들의 신체능력을 생각하면 너무 일상적이라 지나치기 쉽지만 어딘가 숨어 있는 경이로운 작은 보물을 발견한 것 같은 쾌감이 든다.
그리고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몸이 있는지. 이전 글에도 '다양한 몸'에 대한 언급으로 글을 마무리했는데 이 이야기는 혹시 변태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으므로 신중하게 해야 한다. 아주 약간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관음증적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고, 개인적으로 난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고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데다가 정말로 사람들 몸이 너무너무 다양한 것이다. 옷을 입고 있을 때는 패션 스타일과 전반적인 분위기를 먼저 느끼게 된다면(뭐가 먼저인 지는 모르지만 나는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고, 그 사람이 가진 전반적인 인상과 분위기를 기억하게 되어 누군가 머리를 싹둑 자르고 다른 화장을 하고 오면 잘 못 알아본다) 샤워실에서는 적나라한 몸을 보게 된다. 사람의 신체란 얼마나 오묘하고 아름다운가. 20대 아가씨들부터 80대 노인까지, 날씬한 사람, 자세가 곧은 사람, 엉덩이가 처진 사람, 하체에만 살이 많은 사람, 뽀얀 피부를 가진 사람, 가슴이 엄청나게 큰 사람, 유독 까무잡잡하고 타투를 한 사람 등 다양성에 매료되어 자꾸 사람들을 보게 된다. 대놓고 보면 무례해 보일 테니 주로 거울을 통해서 보다가 거울 안에서 눈이 마주쳐서 무안해지기도 한다.
수영장만 들어가도 수영복을 입고 있어서 무언가 장착한 느낌이 든다. 샤워실에서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건강한 수영인들을 볼 수 있다. 모두 다양한 몸을 가지고 있다. 인스타를 보면 세상에 이렇게 쭉쭉빵빵하게 잘 뻗은 사람들만 있는 것 같지만 수영장 샤워실을 가보라. 다양성이 아름다운 우리 몸을 마주하게 된다. 수영을 하러 온 사람들은 자신의 몸이 어디가 예쁜지 아닌지에 다소 무심해 보인다. 비누로 벅벅 씻고 수영복을 잘 입을 수 있으면 그만인 것만 같다. 물론 나처럼 튀어나온 배라든지 작은 가슴에 약간의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도 있을 테다. 그렇지만 그런 게 중요한 곳이 아니기 때문에 괜찮다. 자신의 빼어난 신체를 자랑하러 온 곳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못난 몸을 '나는 내 몸을 사랑해'하고 억지스럽게 긍정하려는 노력을 하지도 않는다. 허세도 긍정도 아닌 그대로의 수용에 가깝다. 감정을 수용하면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주의를 기울이면 나의 감정을 잘 알고 구분할 수 있고, 왔다가 가는 흐름을 느끼게 된다. 몸을 수용하면 몸에 덜 휘둘린다. 나의 신체가 가진 장단점을 알 수 있고, 몸이 물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느끼게 된다. 몸을 보이는 것이 자신이 없어서 얼어있다면 부력에 지장이 있을 것이고, 몸을 너무 자랑하고 싶으면 자세에 집중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수영 첫날 비루한 몸뚱이가 부끄러웠던 나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고, 날씬하고 예쁜 사람들이 많겠지 하는 예상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 몸을 수용하는 분위기를 관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같이 부끄러운 사람도 있을 테고, 몸에 불만이 있는 사람도 자랑하고픈 사람도 있을 테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수용의 공기는 분명 존재한다. 수영을 마치고도 부끄러웠던 수영 강습 첫날의 나는, 맨몸으로 머리를 말리는 긴 시간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속옷을 입고 티셔츠를 하나 입은 상태로 머리를 말리러 가서, 아무렇게나 자신의 몸을 세워놓고 머리를 말리는 수많은 수영인들을 보게 된다. 이제 혼자 옷을 입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 몇 회를 거듭한 이후 강습에서 나는 이제 맨몸으로 자연스럽게 머리를 말린다. 옷에 긴 머리카락이 묻지 않아서 좋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입고 와서 머리를 말리는 사람도 보게 된다. 그 사람의 속사정은 모르지만 이제 옷을 입고 벗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부끄러운 내 마음이 문제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 좋을 대로 하면 되는 거였다. 추우면 옷을 입고, 귀찮으면 바로 머리를 말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