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계절의 그 날씨

by 마인드카소

아이가 4살 되는 해 겨울. 아이와 집에서 느긋하고 삼삼한 오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따뜻한 집을 원하는 육체 때문에 겨울은 산책이 게을러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집 안을 왔다 갔다 좁은 보폭으로 다니다가 베란다 창밖 너머를 보았다. 순간 시선이 고정되었다. 창문 하나 사이로 완전히 다른 세계-영화 같은 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커다란 바구니에 눈송이를 담아서 우리 동네에만 와르르 쏟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흔한 표현대로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펑펑... 함박눈이었다. 이렇게 눈답게 눈이 내렸던 적이 언제였을까. 아이와 이 함박눈을 즐기고 싶다는 설렘이 집에만 있으려는 게으름을 이겨내고 말했다.



와- 눈 온다! 우리 밖에 나갈까?


차분했던 아이도 신이 났다. 갖고 있는 가장 따뜻한 옷과 모자, 장갑, 목도리 방한이 되는 모든 아이템을 꺼내서 아이도 나도 무장했다.

하늘에서 보슬보슬 흰 눈들이 하염없이 내려와 땅에 앉았다. 녹아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소복소복 길 위에 쌓이고 그 눈 위에 쌓이고 또 그 위에 쌓이고... 아이 어깨에도 머리에도 눈이 앉을 수 있는 곳에는 계속 쌓였다. 아이는 가만히 서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생에 처음으로 기억하는 눈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보슬보슬 반짝반짝 하얀 눈송이. 손에 올리면 사르르 사라진다. 어떻게 하늘에서 이런 게 떨어지는 걸까? 어째서지? 신기하고 또 신기했던 기억. 눈을 보는 아이의 시선 속에 어린 내 모습이 보인다.

내가 아이만 할 때 함박눈 속에서 구르면서 놀았던 한 장면도 떠올랐다. 눈밭에서 마냥 행복한 어린 나. 온 세상이 하얗다는 그 아름다운 느낌이 아직 내 마음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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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늘 가던 공원으로 걸었다. 걸어가는 10분 남짓 동안 공원은 내려앉는 눈들을 그대로 받아내 하얗게 변해있었다. 눈이 부시다의 눈이 이 눈이었던가! 정말 눈이 부시게 하얀 공원이었다. 아직 누군가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흐트러짐 없는 하얀 눈길은 보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긴장감이 일었다.


공원에 아이와 나만 있었다. 주변 어린이 집에서도 아이들이 종종 산책 나오는 공원이었는데, 어린이는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끔 지나가는 어른들만 있었다.


100% 완벽한 겨울을 모든 감각으로 느끼기 좋은 날인데 아이들이 없다니!

어린이 집이나 기관에서는 아이들 옷이 젖으니까, 추우니까, 위험하니까 등등의 이유로 아이들과 바깥 놀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쉬웠다.

매년 겨울은 오지만, 겨울마다 느낌은 항상 달랐다. 어떤 겨울은 좀 추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포근했고, 어떤 겨울은 눈은 안 내리고 춥기만 추웠다. 그런 의미에서 이 날의 함박눈은 특별했다.


아이는 눈을 치우는 불도저가 되어서 눈을 두 손으로 밀고 다녔다. 나는 아이가 밀어낸 눈을 뭉쳐서 눈사람을 만들었다. 함박눈은 기분 좋게 뭉쳐졌고 금방 눈덩이를 키울 수 있었다.

깨끗한 눈 도화지에 첫 발자국을 찍는 기분을 느껴본다. 혀로 눈을 받아먹어보기도 한다. 눈 위에서 직접 눈덩이가 되겠노라 굴러다녀도 춥지 않은 듯하다. 아이는 오감을 모두 활짝 열고 눈을 즐겼다.


오전 내내 하얀 공원을 우리가 접수했다. ‘이런 눈은 흔치 않아!’라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놀았다. 이제 집에 돌아갈까?라는 생각이 들 때쯤 내리던 눈이 천천히 그치기 시작했다.

겨울과 눈을 즐기기 좋은 최고의 순간이었구나! 그 뒤로는 이런 함박눈을 보기 어려웠다. 그다음 해 겨울에도...



비가 오는 날도 우리는 비옷을 입고 모자와 우산을 챙겨서 거침없이 산책을 했다. 그런 날도 공원에는 우리 밖에 없었다. 물웅덩이는 워터파크를 방불케 했다. 물웅덩이만 보면 팡팡 뛰는 아이를 보니 내 마음도 덩달아 신나곤 했다.

젖은 옷이야 집에 가서 벗고 씻으면 되고, 시간도 넉넉하니 거리낄 것도 서두를 것도 없었다.


가정보육을 하며 좋았던 점은 예고 없이 오는 그 계절의 날씨를 온전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아이도 함박눈이 내리던 그 겨울의 한 조각 추억이 마음에 오래 남았는지 그림책에서 눈이 오는 그림을 보면 그 날을 이야기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