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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박사 레오 Mar 01. 2021

당신의 기억을 믿습니까?

기억이 스스로를 속이는 이유



Photo by Jon Tyson on Unsplash



엄마는 항상 저를 몰아치고 윽박지르기 일쑤였어요..

심한 경우에는 쌍욕만 안 했지 때리기도 했어요..

항상 명분은 있었어요..

제가 공부를 안 했다.. 게으르다.. 방을 치우지 않았다.. 그렇게 살다가 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엄마 말 안 듣고 잘되나 보자..

하.. 지금 다시 생각해도 너무너무 열 받고 화나요..


어느 날 엄마랑 말다툼을 하다가 터져버렸어요.. 

울면서 엄마한테 물어봤어요.. 중학교 시절 나한테 왜 그랬냐고..

정말 서러움과 억울함과 화가 북받쳐서 그동안 참았던 것을 다 터트려버렸어요..

그런데 엄마는 자기가 언제 그런 얘기를 했냐고 하면서 절대 그런 적이 없다는 거예요..


정말 기가 막혔어요..

저는 중학교 때부터 그것 때문에 10년을 넘게 고통 속에서 살아왔는데.. 

막상 저를 그러게 힘들게 했던 엄마는 기억도 못하고 있었다니..

너무 허탈했고요.. 

저만 혼자 고통받은 것 같아서 더 화나고 억울했어요..



1. 모두의 기억은 서로 다르다


최근 학폭 관련 사건들에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가 '가해자의 기억(및 해석)'과 '피해자의 기억(및 해석)'간에 큰 차이를 보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피해자에게 했던 가해 행동을 가해자가 기억을 못 하거나 혹은 다르게(훨씬 축소된 내용으로) 기억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억의 차이는 결국 진실공방으로 이어지기도 하며, 서로의 감정이 더 상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억은 생각보다 정확하지 않습니다. 

상당한 왜곡이 있기도 하고 각자의 입장과 상황에 따라 변형되어 기억하기도 합니다. 

보통은 5세 이전의 기억들은 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5세 이전의 기억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알고보면 작화(作話, fabulation)에 가까운 경우가 더 많습니다. 

또한 어떤 기억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기 마련이며, 특히 치매 등과 같은 기억 관련된 장애가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신체 기능적 측면에서의 기억 상 문제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기억의 왜곡이나 서로 간의 기억이 일치하지 않는 현상은 우리 생활 속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선택적 기억과 선택적 망각


기본적으로 인간의 정보 처리 상의 한계로 인하여 자신이 수행했던 일을 모두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여러분은 한 달 전 점심 식사로 무엇을 먹었는지에 대해서 기억하시나요?

혹은 일 년 전 오늘 어떤 사건이 있었고 어떤 기분이었는지에 대해서 기억하시나요?

또는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 정확하게 시간대별로 기술할 수 있습니까?

결국 수많은 일들 중 우리는 어떤 일들은 기억하고 어떤 일들은 잊게 됩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라는 스릴러 소설(영화도 있음)이 있습니다. 

과잉기억증후군(?)이라는 병에 걸린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범죄스릴러입니다. 

이 소설에서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인지 심리학적 입장에서 더 구체적으로 보면 우리의 뇌는 모든 사건이나 정보를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를 모두 인출하거나 활용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고장면을 목격한 사람에게 최면을 거는 경우 뺑소니를 쳤던 차량 번호를 되살리기도 하며, 

잊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일이 어느날 문득 떠오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즉, 어떤 정보들은 유의한 정보가를 가진 것으로 판단되어 정교한 정보처리를 하며 다시 인출할 수 있는 수준으로 기억을 유지하나,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정보나 사건들은 쉽게 망각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정보는 기억을 하고 어떤 정보를 망각할까요?

그 과정을 본다면 우리는 우리의 기억이 스스로를 속이는(?)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3. 이기적 인간과 이기적 기억, 그리고 이기적 해석


인간은 기본적으로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리고 기억도 마찬가지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사람 자체가 엄격하게 객관적이지 못하듯이 사람의 기억 또한 객관적이지 못합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관점에서, 그리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기억하고 해석합니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로 고통을 받은 역사적 경험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많은 사건에 대해서 일본은 부인하고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인정을 하더라도 그 의미부여와 해석이 다릅니다. 

국회에 가면 자신들이 여당과 야당을 바꾸어가면서 반대편 입장이 되었을 때 했던 말들은 다 잊어버리고 꼭 새로운 상황인 것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서로를 비난합니다. 

분명히 감정적이고 화를 주체하지 못해서 학생들을 때렸던 선생님이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이를 덮으려고 하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기억은 자신이 편하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망각하며, 

그 해석과 의미부여 또한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다른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는 우리가 처해 있는 사회적 상황은 물론 부모와 자녀, 부부나 연인, 친구 관계 등 사적인 관계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보통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거나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선택적으로 기억 혹은 망각을 하지만, 역으로 부정적인 사건 중심으로 편향된 기억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울증 환자의 경우 자신이 잘했던 일이나 긍정적 사건에 대한 기억은 선택적으로 망각하고, 슬프고 힘든 사건들만을 중심으로 기억하는 경향을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4. 감정이 기억에 미치는 영향


선택적 기억과 망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설득력 있는 설명은 '감정이 실린 기억은 오래간다!'는 것입니다. 

즉, 사건 자체보다도 그 사건과 관련된 감정가가 기억 여부를 결정하는데 큰 기여를 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너무도 행복하고 설레었던 결혼식이나 첫 아이가 분만실에서 나오던 장면은 언제 생각해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반대로 아주 고통스러운 기억의 경우에도 오래 남아 심리적으로 힘들게 하는 경우가 있으며, 그 당시에 대한 재경험이나 거의 동일한 수준의 신체적 변화를 동반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나 전쟁 참전 군인, 혹은 소방관이나 경찰관 등은 참혹한 장면이나 사건들에 자주 노출되며, 이로 인한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를 겪기도 합니다. 


특히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학교 폭력의 경우에, 피해자는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강한 수치심과 분노 등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다가 이와 같은 일들이 반복되었다면 이는 씻을 수 없는 좋지 않은 기억일 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운 감정을 동반하는 기억이 됩니다. 

그렇지만 가해자들의 경우에는 단순한 재미, 혹은 일상적인 사건에 불과하기 때문에 피해자만큼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사건을 기억하지 않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무슨 말이야? 내가 언제 그렇게까지 심하게 했다고 그래?' 혹은 '친하자고 그랬던 거지~'나 '별일도 아닌 걸 가지고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거 아니야?'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감정가가 많이 실려 있던 사건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는 경향을 보이며, 그렇지 않은 일상적 사건에 대해서는 기억을 덜 하거나 쉽게 망각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게다가 감정가가 실린 사건에 대해서는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 혹은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등 그 당시에는 많은 고민과 생각들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를 '정보처리 수준'이라고 하며, 정교하고 깊은 수준의 정보처리를 했던 기억은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즉 피해자와 가해자는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서로 감정가도 다르고 정보처리 수준도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기억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5. 인지부조화 줄이기


기억을 왜곡하는 마지막 이유는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 Cognitive Dissonace)'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기억을 관리한다는 점입니다. 

인지부조화란 '자신의 신념, 태도, 원칙, 행동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써, 인지부조화 상태는 내적인 심리적 불편감을 초래합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내적 불편감을 해소하거나 축소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기억이나 태도와 실제 일어났던 행동 간에 불일치가 일어난다고 하면 이미 발생한 행동이나 과거 사건 자체를 변경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태도를 바꾸거나 기억을 삭제함으로써 인지적 조화를 추구하는 것만이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학교 폭력 사건과 관련하여 '자신이 타인을 괴롭히거나 구타하는 등의 폭력적 행동을 했다'라는 것은 본인 스스로가 '나는 훌륭하고 좋은 성격을 가졌으며,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행동을 한다'라는 신념과 일치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인지적 결론('나는 훌륭하고 좋은 성격을 가졌으며,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행동을 한다')에 맞추어 자신의 기억을 망각(폭력을 가했던 기억을 망각하거나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음)하거나 그 의도나 의미를 왜곡('장난이었어요! 나쁜 의도는 없었어요!'라고 생각하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어쩜 그런 일을 저질러 놓고 저렇게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인지부조화를 해결하고 내적인 조화를 이루어 심리적으로 편안함을 가질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습니다. 

역으로 보면, 피해자의 경우에는 '나는 충분히 가치 있고 존중받아야 하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나, 가해자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면,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폭력에 굴하고 심리적으로 수치심과 심각한 고통을 느끼는 상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만약 이와 같은 부조화를 해결하지 못하면, '나는 소중하고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과 실제로는 '고통받고 존중받지 못했음'이라는 행동적 결과 사이에서 계속해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혹은 불행히도 '고통받고 존중받지 못했던 결과'에 자신의 신념이나 원칙을 맞추어 '나는 문제가 있으며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야!'라는 극히 부정적 자아상을 가지게 됩니다. 




최근 학교 폭력이 이슈가 되면서 일련의 사건들에 비추어 우리의 기억이 어떻게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현상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것은 부모-자녀 및 부부 등과 같은 정서적 관계에서입니다. 

왜냐하면 지내온 시간 자체가 매우 길었으며, 이제는 시간 자체가 많이 지나서 기억 자체도 희미해지고 서로가 기억하는 내용에서도 차이를 많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그렇듯이.. 제 글의 목적은 현상에 대한 설명에 있지 않습니다. 

현상이나 문제의 해결에 있습니다. 

과거의 기억으로 인하여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분들께 억울함이나 분함, 그리고 서로 간의 이해에 도움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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