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by 유튜브 캡처
최근 모 배구선수로부터 시작된 학폭 논란이 일파만파 커지면서 확대일로에 있습니다.
아무리 오래전에 저질렀던 잘못이라도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마땅한 처벌을 받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는 말과 같이 이와 같은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림으로써 모두에게 문제의식을 각성하고 관련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는 기능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련 전문가로서 보면, 이와 같은 문제들이 본질이나 핵심적 요소들은 간과된 채 자극적인 보도나 가해자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 수준에 머무르지 않나 하는 걱정과 염려 또한 들기도 합니다.
특히 그래도 용기 내어 문제를 제기한 피해자들과 가슴 깊은 곳에 트라우마를 묻은 채로 아직도 말도 못 꺼낸 채 마음속으로만 울고 있는 다수의 침묵하는 피해자들을 고려한다면 우리 모두의 관심이 좀 더 건강한 방법으로 전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한 학생이 다른 학생에게 심하게 폭력을 가했다고 하면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잘못된 폭력 행사가 맞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주먹질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폭력을 행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가시적이고 신체적인 폭력만큼이나 심리적이고 비가시적인 폭력 또한 폭력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는 '2차 가해' 혹은 '온라인 댓글'을 통한 비난이나 공격입니다.
이제는 댓글 실명제 등과 같은 제도적 장치들이 보완되기는 하였으나 인터넷 댓글을 통한 마녀사냥이 엄청나게 발생하였던 일이 있습니다.
또한 자기 팬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가해자의 팬클럽에는 피해자에 대한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이나 비난이 하는 등 2차 가해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 또한 분명한 폭력 맞습니다.
신체적인 폭력의 상처는 눈에 보이기 때문에 치료를 받게 되며 시간이 지나면 아문다고 할지라도, 마음에 남겨진 상처와 심리적 손상은 눈에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관리도 인식도 안되어 더욱 오래 지속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정확한 팩트는 지하실에서 몇십대를 때렸는지에 대한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정황뿐 아니라 그로 인해서 손상된 심리적 측면도 있습니다.
가정폭력과 관련된 피해자의 심리적 고통을 다룰 때에 고려해야 하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방관자의 역할입니다.
예를 들어 아빠가 자녀들에게 심한 폭력을 가한 경우 엄마가 이를 방어해주지 못하거나 혹은 아빠의 폭력을 방치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물론 폭력을 직접 행사한 아빠가 제일 나쁩니다.
하지만 이를 방관하고 폭력의 피해자가 되도록 방치한 그 엄마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엄마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며, 엄마도 폭력의 피해자인 경우가 많지만..) 방관했던 다른 사람들 역시 피해자에게 유사한 심리적 손상을 주는 대상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마치 민주화 투쟁의 열기가 뜨거울 때, 독재정권의 만행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적극적인 저항을 하지 않은 사람 역시 어느 정도 비난을 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혹은 정치가 싫고 정치인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이나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투표를 하지 않는 것 또한 비난받는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길을 가다가 쓰러진 사람이나 사고를 당한 사람을 지나치지 말고 돕는 것이 맞으며, 자신의 편의나 혹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 두려워서 그냥 지나쳐 버린다면 이 또한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보면, 학교 폭력의 문제는 단순히 가해자만의 문제라거나 혹은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문제로만 한정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자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게다가 내가 무심하고 지나쳤다면, 그와 유사한 문제들이 나 자신의 일로 다가왔을 때에 아무도 도와주지 않더라도 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비난할 수 없기도 한 이유가 됩니다.
우리가 침묵하고 지나쳤기 때문에 가해자들은 더욱더 당당할 수 있었으며, 피해자는 더욱더 고통을 받았을 수 있습니다.
적어도 학교 폭력의 문제들이 나올 때에, 일방적으로 가해자에 대한 비난이나 공격만 할 것이 아니라 방관자였던 우리 모두의 책임에 대해서도 통감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청소년들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에 필수적(?)으로 일진이나 학교 폭력이 나온다는 것을 아시나요?
청소년 드라마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녀들이 학교 폭력의 피해자 혹은 가해자라는 설정으로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가 상당히 많습니다.
오늘 글 배경 사진도 학교폭력이라는 유튜브 검색을 해 보면 나오는 관련 동영상 리스트입니다.
그중에는 최근 매우 인기 있는 혹은 예전에 인기가 많고 시청률이 높았던 드라마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일진이나 학교 폭력 내용이 나오기만 해도 손발이 떨리고 두려움과 불안감이 다시 치솟아서 이를 보지 못하는 엄청나게 많은 시청자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셨나요?
작가분들이나 드라마의 시청률을 높여야 하는 입장에서는 최근 이슈가 되는 학교 폭력이나 일진의 문제를 MSG와 같은 필수 양념처럼 첨가하실지 모르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과거의 아픈 기억이 자극받고 트라우마를 재경험하는 사람들이 다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유행하게 된 표현이 바로 '힘숨찐'입니다.
'힘숨찐'은 '힘을 숨긴 찐따'의 줄임말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며, 이는 약한 자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엄청난 힘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견디고 참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소설이나 웹툰, 혹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숨겨진 힘을 드러내며 복수를 하거나 정의의 칼을 휘둘러 통쾌하고 시원한 복수를 하여 정의 실현을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정석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반인들이 그와 같은 내용에서 대리만족과 쾌감을 느낄 때에, 자신의 아픈 과거와 관련된 내용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받는 다수의 침묵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웹툰과 영화에서는 숨겨진 힘을 통한 복수와 정의 실현을 하게 되나, 자신은 왜 숨겨진 힘도 없고 복수도 못하며 정의 실현은 커녕 말도 못 한 채 혼자서만 고통받아야 하는지에 관한 생각으로 더욱더 고통스러운 침묵자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간음을 한 사마리아 여인을 율법에 따라서 돌로 쳐 죽여야 하는지에 관해 묻는 자들에게 했던 예수님이 답변이 나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이 표현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벌을 주고 안 주고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잘못을 했으면 당연히 벌을 받고 처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핵심은 단순한 처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진정한 반성과 함께 벌하려는 사람들의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즉, '남의 눈의 티끌은 보면서 자기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는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또한 학교 폭력 등과 같은 사건에 있어서도 처벌 수준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반성이나 사과, 그리고 잘못에 대한 응당한 처벌과 더불어 '가해자를 비롯한 우리 모두의 반성과 재발 방지를 위한 심사숙고와 올바른 대처'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학교 폭력 가해자를 엄청나게 비난하면서 뒤로는 자기 업무를 통해 얻은 정보를 기반으로 땅 투기를 하고도 우연이라고 말하는 뻔뻔한 공기업 직원들은 문제일 것입니다.
'인간이 어쩜 저리도 나쁜 짓을 할 수가 있지?'라고 가해자를 비난하면서, 부하직원들을 고통스럽게 (소위!) 갈구는 상사 또한 문제일 것입니다.
자기도 재산신고 누락으로 조사를 받고 있는 와중에 청문회에서 다른 사람의 재산신고 누락에 대해서는 큰소리로 비난하는 국회의원을 보면서 기가 차는 이유도 바로 이런 것일 겁니다.
모두 남을 비난할 줄만 알지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건강한 문제의식이 없는 경우들입니다.
적어도 '죄 없는 자만이 돌을 던지라'는 것만 고려해도 우리는 반성과 자성의 마음으로 모두가 책임을 느끼면서, 단순하고 자극적인 비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들에 대한 진지한 배려'와 '다시는 동일한 문제로 유사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과 실행' 등이 겸비된, 합리적이고 건강한 문제 제기와 책임 추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 이를 보도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조심스러움과 신중함이 요구됩니다.
왜냐하면 이로 인한 부작용도 많으며,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가십거리처럼 다루어지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자살보도 권고기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학교 폭력과 관련된 보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말없이 침묵하고 있으며, 자극적인 기사로 인하여 트라우마에 대한 재경험으로 고통받고 있는 다수의 침묵하고 있는 피해자들을 배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행동들은 가끔씩 그들의 존재를 고려하지 못하거나 혹은 그들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걱정이 들게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몇몇 교육 행정가분들이 가해학생의 인권보호를 위한 학교폭력 사실에 대한 학생부 기재를 막았던 일이 있었습니다.
대체 얼마나 훌륭하신 인권 정신으로 그런 주장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주장이 가해자 편향적인 인권 정신이며, 그와 같은 주장으로 인하여 수많은 학교 폭력 희생자들이 훨씬 더 큰 고통을 겪었는지에 대해서 알고 계시려나 모르겠습니다.
물론 가해자가 철저하게 반성하고 진지하게 사과하였으며, 재발을 위한 어떠한 노력이나 감수하고 이를 실제로 수행한 후 피해자의 동의 하에 가해사실을 삭제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런 진지한 사과와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가해 행동에 대한 용서가 너무 쉽게 이루어진다면, 이는 피해자에게 두 번 고통을 주는 행위이며 가해 행동에 대한 철저한 문제의식을 가질 기회 자체를 없애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학교 폭력과 관련하여 분개하고 비난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혹은 비난 방법 상에서 피해자들에 대한 진지한 배려가 동반되기를 바랍니다.
가해자들을 비난하고 욕해도 됩니다.
하지만 그들을 비난하고 욕하는 만큼 피해자들의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노력도 병행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발생하였는지 가해자와 그들의 부모와 당시 학교 책임자들을 비난하여도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앞으로 그런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을 것에 대해서도 공을 들이시기 바랍니다.
수년 동안 고통을 견디다가 폭로를 했던 피해자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요?
피해자들에 대한 진지한 공감과 배려를 통한 마음의 치유와 본인과 같은 아픈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와 같은 의도와 목적에 맞도록 행동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들며, 고통과 상처를 최소화하는 사회가 가는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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