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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의미 있는 신문기사가 하나 나왔습니다.
제가 수련을 받았던 삼성의료원 정신건강의학과 전홍진 교수님 연구팀에서 '극단적 선택과 베르테르 효과 간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내용이며, 이를 연합뉴스의 김잔디 기자님이 보도해주신 내용입니다.
(https://news.v.daum.net/v/20210722094250396?x_trkm=t)
우리 모두가 꼭 알아야 하고 같이 지켜야 할 원칙들로 생각되어 공유하고자 합니다.
저는 군대를 인사과 행정병으로 보냈습니다 ㅠㅠ (팔자가.. 그냥.. 사람과 엮이는 팔자인 듯.. ㅠㅠ)
매월 신병을 30명에서 많을 때에는 100명까지도 받아서 직무를 부여하고 그들의 진급과 상벌 등 인사적 관리나 사건사고처리를 하는 것이 주 업무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석사 과정 중 군대를 갔기 때문에 아주 늙은(?) 사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주 특이한 분이 신병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우선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한두 달만 더 잘 버텼으면 나이 제한으로 면제를 받을 수 있었던 두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ㅠㅠ
중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고, 미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시다가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군대를 오게 된 특이한 케이스였습니다.
나이도 있어 특별 대우(?)를 받던 그 분과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누던 중 저의 전공을 묻길래 'Clinical Psychology(한국말로 임상심리학이라고 말해드렸더니 못 알아들으심 ㅠㅠ ㅋㅋ)'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반색을 하면서 자신의 과거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이민을 가서 적응하느라고 너무 힘들었을 때, (한국에서처럼) '죽고 싶다!'라는 표현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를 들은 (미국인이었던) 친구가 선생님께 '자살 사고'가 있는 학생이라고 신고를 해서 강제로 상담과 심리치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냥 문화적 차이에 따른 표현이며, 한국에서는 많이들 그렇게 말한다고 했지만 소용없이 강제 상담을 받아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 당시 (강제로 받았지만) 받았던 상담이 이민자로서의 적응 위기를 겪는 과정에서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고 회상하였습니다.
우리는, 혹은 우리 문화는 '죽고 싶다'라는 표현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간과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님과의 면담 중에 너무도 태연하게 '우리 애가 스트레스가 많은지 가끔 '죽고 싶다'라고 말하기도 했어요'라고 말씀하실 때면 깜짝 놀라게 됩니다.
혹은 '아~ 열 받아! 확 죽어버릴 거야!!'라고 울부짖는 자녀의 극단적인 표현에 '너는 어떻게 부모 앞에서 그런 표현을 써? 너 정말 뒤지게 맞아야겠구나!!'로 더 극단으로 반응하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됩니다.
때로는 부하직원이나 친구들이 직장생활을 토로하는 중 '가끔 옥상에서 떨어져 내리면 어떨까 싶은 생각을 해.. ㅠㅠ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그런 정신머리로 어떻게 이 힘든 세상을 헤쳐나갈 거야?'라고 몰아치기도 합니다.
이는 아주아주 잘못된 접근입니다.
'죽고 싶다'라고 언급할 정도가 정도면, 그 전에는
'힘들다'
⇒ '너무 스트레스받는다'
⇒ '다 포기하고 싶다'
⇒ '정말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 -
⇒ '이 상황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죽는 것 밖에 없는 것인가? 다른 방법들은 없을까?' -
⇒ '아.. 좌절스럽다.. 다른 방법들을 다 시도하고 노력해봐도 안되네.. 그렇다면, 결국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등등의 긴긴 과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긴긴 과정 속에서 나름대로 어떻게든 해보려고 갖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이 안 된 채 그 고통이 지속되고 심화될 때 나오는 표현이 '죽고 싶다'입니다.
즉 그렇게 표현하는 분들은 '엄청나게 처절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현재를 버티고 있는 중이라는 의미입니다.
'극단적인 선택'은 이처럼 '엄청나게 처절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그래도 버티고 이겨내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와중에 안 좋은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 (미리 상상하고 준비했던) 의도적인 시도를 하거나 혹은 '욱'하는 마음에 충동적인 실행을 하면서 발생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도를 반복하던 중 '시도가 성공'하여 극단적인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이와 같이 어떤 방식으로든 절박하게 버티고 있는 상태를 흔드는 사건을 촉발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문이나 언론에서 유명인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도하는 과정은 이와 같은 '촉발 사건'의 기능을 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관심을 유발하고 흥미로운 기사 내용으로 대중들의 '좋아요'를 이끌어내야 하는 것이 언론의 기본적인 생존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언론의 행동으로 인한 부작용이나 문제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얼마 전 유명했던 '조OO'이라는 범죄자의 출소를 계기로 수많은 유튜버들이 자극적인 방송을 하고, 이를 통해서 수천만 원씩의 이익을 얻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만약 피해자분들의 고통에 대한 진지한 공감과 배려, 그리고 자극적 기사와 방송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지역주민이나 다른 분들의 심리적 피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는 건강한 언론의 행동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명인의 극단적인 선택을 공공성을 가진 방송이나 매체들에서 (의도하지 않거나 혹은 '재발 방지'라는 목적이었다고 해도) 무분별하게 보도하거나 자극적인 이슈로 삼는 것은 분명 문제입니다.
유명인의 극단적 선택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베르테르 효과'의 심리적 과정을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단순히 따라 하기'입니다.
힘들고 지친 마음에 어려운 상황을 비관하거나 혹은 자신의 심리적 고통을 견디다 못해 (유명인의 행동을 보고) '따라 하기'를 하는 것입니다.
별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생각은 없었거나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유명인의 행동이 신문지상에서 떠들썩하게 알려지는 과정에서 '모방학습(관찰학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특히 신문이나 방송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 동기와 배경, 그리고 장소에 대한 생생한 사진이나 과정, 그리고 그로 인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 등을 자세하게 묘사하면 할수록 '모방학습'도 정교하고 체계화되어 발생하게 됩니다.
둘째는 '해도 되는구나'입니다.
이미 진작부터 극심한 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었으며 극단적 선택을 할 생각들을 하고 있었으나 가족이나 친구들에 대한 걱정이나 시도할 용기가 없어 머뭇거리던 사람들이 유명인의 극단적 선택을 보면서 '나도 해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극단적 선택을 한 행위자가 '유명인'이고, 신문이나 방송에서 반복되어 노출되고 언급이 될수록 '나도 해볼까?' 혹은 '해도 되나보다!'라고 생각하는 정도와 비율은 높아집니다.
셋째는 '추종 행동'입니다.
내가 믿고 따르거나 좋아하고 애정하던 사람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면서 그 추종자들이나 팬들이 이를 따라 하는 현상입니다.
특히 엄청난 팬덤을 보유한 연예인이나 강력한 정치적 신념이나 업적으로 인하여 신봉자들이 많았던 정치인의 극단적 선택에서 많이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가족 구성원 중 한 사람의 극단적인 행동이 다른 가족의 극단적인 행동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며, 혹은 팬들이 유명인의 장지에 찾아가서 자신의 팬심을 보이는 차원으로 자해를 하기도 합니다.
넷째는 (추종을 넘어서서) '신념에 가득 찬 적극적 선택'입니다.
이는 단순히 따라하기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나 신념을 행동으로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제국주의적 신념과 희망에 가득한 옆 섬나라에서의 '할복 행동'이나 조국과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뻔히 죽을 것을 알면서도 비행기를 몰고 적 전함에 뛰어드는 '가O가O 자살 특공대'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혹은 유명한 정치인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어기는 사건이 벌어지거나 혹은 유명인사들이 자신의 억울함을 행동으로 증명하거나 잘못을 보상한다는 의미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이에 해당합니다.
특히 유명인을 추종하는 경우에는 유명인의 극단적인 선택을 '혼자 모든 것을 책임지는 행동' 혹은 '우리가 그분을 너무 힘들게 했어!ㅠㅠ'라는 등으로 "정당화" 혹은 "미화"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이로 인해 극단적 선택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부정적 파급효과들이 가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결국 극단적인 선택이 당장 발생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자신의 원칙이나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서 '신념에 가득찬 적극적 선택'으로 '극단적 선택'을 고려하게 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제 폰에는 24시간 저에게 언제든지 연락해도 되는 분들이 계십니다.
보통은 5분 이하 정도이나 많은 때에는 10명 가까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명백한 극단적 선택 사고' 혹은 '극단적 선택 시도 경험자'이신 제 고객과 내담자분들이십니다.
이분들은 언제라도 상관없이 위급하거나 절박한 상황에서는 저에게 전화를 하셔도 됩니다.
그래서 유명인들의 '극단적 선택'이 발생하면 이후 일주일 정도는 스마트폰을 제 품에 안고 잠듭니다.
왜냐하면 새벽 한두 시에도 불쑥 절박한 카톡이 날아오거나 위급한 통화를 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꼭 그렇게까지 해야 돼요?'라고 반문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문지상이나 TV나 유튜브에서 극단적인 선택과 관련된 얘기가 반복되어 언급될 때 자신의 심리적 고통이나 혹은 극단적 선택을 한 가족이 있는 분들은 억장이 무너지고 잠 숨기고 덮어왔던 숨겨진 아픔들이 모두 뒤집어지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이런 과정이, 그리고 이를 통해서 드러난 내면의 아픔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지는 아신다면 그런 얘기를 할 수 없습니다.
보통 심리적 부검이라고 하는 과정을 진행하다 보면, '극단적 선택' 이전에 '극단적 호소'나 '간절한 도움 요청'이 있었거나 혹은 '반복되는 (비-치명적) 극단적 선택 시도'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미 극단적 선택으로 극단적인 결과가 나온 후에는 아무런 소용없는 일이 됩니다.
나중에 백번 후회하고 자책을 한다고 해서 결과나 상황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극단적 선택 이전에 보였던 (예방이 가능했던) 사전 사인들의 중요성과 적극적인 대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입니다.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 이를 한 개인의 책임과 행동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란 상호 의존하고 개입하여 역동적 상호작용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작은 노력이나 관심이 극단적인 선택을 예방하거나 방지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와 같은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그 사람' 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건강과 조금이라도 모두가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데 분명 기여할 것입니다.
특히 언론은 한 개인보다도 엄청나게 큰 책임감과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만큼 파급력이나 영향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언론이 올바른 신념을 가지고 진정성 있는 행동을 할 때에는 사회를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역으로는 잘못된 언론의 보도행태나 관습이 우리 모두의 아픔과 심리적 고통을 극대화할 수도 있습니다.
유명인이나 이분들의 행동을 그대로 대중에게 전달하는 언론매체들은 이와 같은 건강한 책임감과 사명감이 더욱더 필요합니다.
한 개인의 극단적 선택은 엄청난 파급력을 가집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따지거나 증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만약 한 개인의 극단적인 선택으로 인하여 극단적 선택을 따라하거나 극심한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심각하게 다루어야할 사안인 것은 맞습니다.
극단적 행동을 하신 분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죄책감과 심리적 고통을 겪게 하며, 대단한 심리적 혼란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처럼 극단적 선택으로 인해 발생하는 그분의 삶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겪어야 할 고통이나 아픔을 생각한다면, 그 고통과 아픔을 겪고 치유하고 해결하는데 들어갈 에너지의 100분의 1의 노력을 미리 한다면 극단적 선택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반성하고 내가 할 수 있는 100분의 1의 노력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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