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 우리는 썸 타는 사이일까

말을 해야 알지

by 새벽달풀

비슷한 집에서 자란 사람끼리는 대화 없이도 통한다고들 한다.

그와 대화를 시작하자, 묘하게 그 말이 믿어졌다.


대화를 나눌수록 이 사람이 점점 더 궁금해졌다.

카톡으로는 부족했다.

목소리도, 이름도 알고 싶었다.


그런데 이 사람,

이름조차 묻지 않는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대화를 계속 이어가고 있었고

그는 늘 빠르게 답장을 보내왔다.


며칠이 그렇게 흘렀다.

나는 내 성격이 은근히 급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남자 못 만나 안달 난 사람처럼 적극적이고 싶지 않아.'

'어쩌면 상대도 궁금한데 참고 있을지 몰라.'

'여자, 남자가 무슨 상관이야.'

난 용기 있는 여자였다.

"목소리 듣고 싶은데, 통화해도 괜찮을까요?"

상대는 흔쾌히 전화를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사투리 없이 단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헉! 말은 던졌는데 무슨 말할지 준비는 못했잖아.'

반가움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는데, 말은 잠겼다.

수화기 너머, 그의 조용한 웃음소리만 새어 나왔다.


"목소리 듣고 싶다면서요. 들으니까 어때요?"

"아... 좋네요."

"민결 씨는 통화하고 싶단 생각 안 했어요?"

"통화하고 싶었지만, 먼저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제가 좀 그래요."

"아니에요. 그냥 제가 먼저 말해서 좀 머쓱했을 뿐이에요."

짧은 통화를 마치고, 다시 편한 카톡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우리 만날래요?"


글자 속 '우리'라는 말이 주는 소속감이 아주 따뜻하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나만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다.

조금 서운하던 마음이, 작은 고백 한 마디에 풀려버렸다.


"네, 그래요. 갑자기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드셨어요?"

"그게... 만나자는 말만큼은 제가 먼저 하고 싶었어요."

그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아 피식 웃었다.

그리고 알 것 같았다.

그가 왜 5년 동안 썸 한 번 없었다는지.

조금 느리고, 조심스럽지만 그의 사람 냄새가 나에겐 점점 친근하게 느껴졌다.


늘 남자가 이끌고 여자가 따르는 게 자연스러운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조심스러운 걸음이 더 좋았다.

밀어붙이지 않는 온도, 그게 나를 편안하게 했다.


그는 너무 조심스럽고 세심해서

함부로 다가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그리던 ‘첫 만남의 장면’을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우린 퇴근 시간에 맞춰 마지막 해가 조금 남아 있는 한적한 공원 주차장에서 만났다.

차에서 내려 그의 차에 탔는데

익숙했던 카톡 속 웃음과 낯선 현실의 공기 사이에서,

내 얼굴은 입만 웃고, 손끝은 허공을 맴돌았다.


"차라도 한 잔 마시러 갈까요?"

"네 좋아요."

"혹시 가시고 싶은 곳은?"

"저는 바다가 보이는 커피숍 좋아해요."


이동하는 동안 그의 침묵이 불편하진 않았다.

미소 띤 얼굴로 운전에 집중하는 그와

헤실거리며 창밖만 보고 있는 내가 있을 뿐이었다.

창 밖으로 해 질 녘 노을이 산과 산 사이를 붉게 채우고 있었다.

지금의 내 마음속 낭만처럼...


커피숍에 들어가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보통은 취미나 관심사로 가벼운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우린 서로 살아온 삶이 궁금했다.

서로의 겪어온 이야기를 풀어놓고,

달라진 생각과 감정들을 나누었다.

무거운 주제였지만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2시간 넘게 이어진 대화는
어쩌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눈빛은

세월이 한참 지나도 잊히지 않을 진심을 담고 있었다.


커피숍이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벅찬 마음을 진정시키려다 문득 생각했다.

'왜 다시 만나자는 말을 하지 않지?'

'이 벅참은 나만 느끼는 걸까?'
운전하는 그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뭔가 콕 집어두지 않으면 다시 못 만날 것 같은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혹시... 저 계속 만나실 마음이 있으세요?"

'아 괜히 말했어. 좀 더 기다릴걸.'

운전하던 그의 시선이 잠시 나를 스쳤다.
"네!! 저는 또 만나고 싶습니다. 혹시 아닌 것처럼 보였나요?"

'말을 해야 알지...'

살짝 원망 섞인 생각을 하며 웃었다.

"아니요. 그럼 우리 또 만나요. 오늘 정말 오래간만에 즐거웠습니다."


"우린 썸 타는 사이가 된 게 맞겠죠?"

"그랬으면 참 좋겠다."



글쓰기를 잠시 멈추고 있는 동안,
다시 한번 브런치에 글 쓰시는 작가님들이
참 대단해 보였습니다.


어쩌면 핑계일지 모르지만,
세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저는
글쓰기가 참 버겁게 느껴졌거든요.


다시, 조금 느려도 부족해도,

발행일에 매이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끝까지 써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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