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클레어, 넌 어디로 날아가고 있니

소설 <데미안>을 읽고 드는 여러 생각의 편린들에 대하여

by 김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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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요약

"데미안"은 청소년 싱클레어가 만난 새로운 세계를 소개하고, 그 세계에서의 자아성찰과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를 다룬 소설이다.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라는 소녀를 만나 그녀에게 매료되며, 봉사와 순결을 추구하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변화한다. 데미안은 그의 친구로서 그의 시야를 더욱 넓혀주는 역할을 하며, 어느 날 사라지지만 그의 영향은 싱클레어의 인생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인해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군에 소집되고, 싱클레어는 부상병 수용소에서 데미안을 다시 만난다. 그리고 데미안은 에바 부인이 전한 것이라며 싱클레어에게 키스를 하고 다음 날 사라진다.




<데미안>을 읽으며 생각한 것

카를 융의 ‘그림자’로 일컬어지는 세계가 소설 <데미안> 속에서는 싱클레어가 마주하는 금기의 세계, 쾌락과 성의 세계로 표현되고 있다. 오늘까지 (2023.03.19) 이야기의 약 55% 정도를 읽었는데, 싱클레어는 지금 빛과 어둠의 세계를 통합하여 일종의 제3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인 듯하다.


이야기 중간중간 고전의 인물을 인용한 부분도 많고, 성서 속 장면을 인용하거나 삶과 죽음, 선과 악에 관한 심오하고 철학적인 이야기들도 더러 나오는 바람에 흐름이 끊기기 일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미안> 소설 속 수많은 상징과 비유들이 나의 머릿속 지식을 한층 더 기름지고 살찌게 해주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다 읽고 난 후엔 영양가있게 소화하는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소설 속에 언급된 인물들 (예를 들면 단테와 베아트리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더 찾아본다든지, 데미안이 듣는 수업의 작가의 작품을 더 찾아본다든지 하는 가지 뻗기식 인풋을 하는 중이다. 지금은 어떤 인물인지 구글링하고 언급된 책은 읽고 싶은 도서에 넣어둔 정도이지만 <데미안>을 읽고 난 후 싱클레어가 나를 어떤 지식 가지로 나를 뻗어나가게 해 줄지 매우 설레는 중이다.


한편, 아직 45%의 분량이 남았다는 것은 조금 의기소침해지는 부분이다. 생각보다 분량이 많다. 그리고 원래는 매일 조금씩 읽어 오늘 완독 후 그림자 이론과 엮어 생각을 엮어보려 했는데 실패했다. (몰아 읽는 것에 대해 조금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예상했던 것보다 완독 하는 데 좀 더 시간이 걸릴 듯하다.


이야기 후반부에 가면서 싱클레어는 소위 말하는 ‘각성’을 하는 것 같다.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게 하는 상징들이 있다. 어쩌면 그의 정체성의 일부를 나타낼지도 모르는 카인, 아브락사스, 데미안, 피스토리우스 같은 인물들. 그리고 에바 부인이 있다. 에바 부인이 없었다면 싱클레어의 나를 찾는 여정은 힘을 잃고 타락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에바 부인은 싱클레어가 자기 세계 속 ‘특별한 사람’이 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인물로 구체화된 싱클레어의 ‘그림자’와 그 ‘그림자’를 포용한 후의 제 3의 인격으로 표현된 ‘새로운 싱클레어’가 데미안과 에바 부인이 가진 성격의 복합적인 형태로 그려진 게 아닌가 생각했다 (쓰면서도 말이 어렵다).



아래 구절이 특히 와 닿았다. 불투명한 미래상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건 그 모든 것에 대처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 두는 것. 싱클레어에게는 그 과정에 데미안과 에바 부인이 있었다면, 나에게는 누가 있을까? 꼭 사람이어야 할까? 어쩌면 살아오며 겪는 극적 사건이나, 어떤 사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의무로 느끼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완전히 자기 자신으로 도달하는 것, 자기 속에서 움트고 있는 자연의 싹을 안전하고 올바르게 가꾸어 한결같이 그 의지에 따라 삶을 영위함으로써 불투명한 미래상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건 그 모든 것에 대처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 두는 것이었다.



독서를 마친 후, 이런 질문이 머릿 속에 남았다.


”나는 지금 ‘자기 자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에게 데미안은, 에바 부인은 누구일까?”
”아직 만나지 못 했다면 어떤 형태로 만나게 될까?"



세상의 환난에 일희일비하는 걸 보면 아직 에바 부인은 못 만난 것 같기도 한데 말이다.






인상 깊었던 부분

식사 때의 에티켓부터 말씨나 옷차림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정신을 쏟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제일 먼저 냉수마찰을 했는데, 처음에는 상당한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언제나 품위 있는 태도와 단정한 자세를 취하려고 노력했고, 걸음을 걸을 때도 위엄을 갖추려고 했다. 주위 사람들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보였을지도 모르고 아니꼽게 여겨졌는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그것이 모두 신에 대한 봉사였던 것이다.


얼굴의 윤곽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으나, 저녁 햇살에 붉게 물든 눈이나 이마나 유달리 빨갛게 보이는 입은 화면에서 떠올라 불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둠의 그늘이 덮이기 시작하여 그런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나는 오랫동안 그 초상화 앞에 마주 앉아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이상하게도 그 초상화의 얼굴은 데미안도 아니고 베아트리체도 아니고 — 나 자신의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 얼굴이 그렇게 생긴 것은 아니다. 그 그림은 내 생활의 내용이며 내 세계의 내부였다. 내 운명이고 내 수호신이기도 했던 것이다. 언젠가 내 앞에 벗이 나타난다면 그는 이런 얼굴의 사나이가 틀림없을 테고, 연인이 나타난다면 틀림없이 이런 얼굴의 여자이리라 — 그것이 내 삶과 죽음의 운명이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버둥거린다. 그 알은 새의 세계다. 알에서 빠져나오려면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의 곁으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라 한다.


‘우리는 하나의 신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숭앙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신은 세계를 제멋대로 갈라 놓고 그 반쪽에밖엔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데미안이 말하는 ’세계의 반쪽’이란 이른바 허용된 밝은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 전체를 다스리는 절대자를 숭앙하지 않으면 안 돼. 그러니까 악마 같은 신을 받들든가, 그렇지 않으면 신에 예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마에게도 예배하지 않으면 안 돼.’

그런데 아브락사스는 신인 동시에 악마, 신성과 악마성이 결합된 것 같은 신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의무로 느끼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완전히 자기 자신으로 도달하는 것, 자기 속에서 움트고 있는 자연의 싹을 안전하고 올바르게 가꾸어 한결같이 그 의지에 따라 삶을 영위함으로써 불투명한 미래상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건 그 모든 것에 대처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 두는 것이었다.


누가 흔들어 깨우는 것 같아 눈을 떠 보니 아침이었다. 옆의 매트리스에는 낯선 사나이가 누워 있었다. 나는 치료를 받았다.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고 하는 것이 몹시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요행히도 열쇠를 찾아 내 마음의 문을 열고 나 자신 속으로 들어가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내부 세계의 깊숙한 곳에 있는 마음의 거울에는 운명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어두운 그 거울 위에 허리를 굽히기만 하면 나 자신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거울에 비친 그 모습을 내 친구며 내 인도자인 그 사나이를 닮아 있었다.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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