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살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이번주 글감
'85살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먼 미래로 순간 이동을 했다고 상상해 보세요. 85살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요?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요? 일을 하고 있을까요? 여가 시간에는 무얼 하며 지낼까요? 여러분이 그리는 가장 이상적이고 멋진 나의 85살을 공유해 주세요.
*이 글은 일요일 저녁 글쓰기 모임 '나를 위해 쓰기로 했다'의 글감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저는 영화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은 ‘큰 이야기’에 맞서 그 이야기를 상대화할 다양한 ‘작은 이야기’를 계속 내놓는 것이며, 그것이 결과적으로 문화를 풍요롭게 만든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자세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괴물>을 봤습니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과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처럼 세상의, 인간의 어두운 면을 섬세하게 포착할 수 있을까요.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들에는 언제나 불완전한 가족이 등장합니다. 이 ‘불완전함’이란 대체로 사회 안에서 소수가 되는 범주에 속하는 속성을 가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소수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치 사회 구조의 피해자로 비추며 일방적인 연민을 구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문제아 취급을 하지도 않죠. 다만, 그들이 가진 불완전함 (이라 일컫는 무엇)과 완전함(이라 일컫는 허상) 속에서 피어나는 서스펜스를 담담하게 그려낼 뿐입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는 부당함을 토로하는 호리 선생님에게 교장 선생님이 했던 말입니다.
사실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히로카즈의 영화는 사실이라는 ‘허상’을 둘러싼 작은 인물들의 분투를 그려냅니다. 이 작은 이야기가 지금 저에게는 정말 소중합니다. 이 영화를 이렇게 오랫동안 곱씹게 될 나이가 되었고, 경험을 쌓았고, 관찰을 했다는 것이겠지요.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부터 저 또한 어떠한 형태로든 히로카즈 감독처럼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점점 더 깊어만 갑니다.
나무위키에 나온 정보들을 훑으며 히로카즈 감독의 덕질의 문을 열어봅니다. 히로카즈 감독은 대학을 졸업하고 방송국에서 다큐를 만들다가 1995년 <환상의 빛>으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했습니다. 이때 나이가 만으로 33살쯤 되었겠군요. 그리고 괴물이라는 엄청난 작품을 만든 지금의 나이는 61세입니다. 감독으로 데뷔하고 괴물을 만들기까지 28년이 걸렸습니다 (<환상의 빛>부터 이미 역작이긴 했지만 그럼 천재라는 높은 벽이 생기므로 경력을 기준으로 계산해 보고 싶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꾸준히 거장들의 생각을 훔쳐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면 조금이라도 비슷한 것을 28년 후에는 만들 수 있게 될까요? 재능은 천부적이라는 믿음에서만 벗어난다면 어쩌면 85살 즈음에는 얼추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으로부터 28년 후의 나를 상상해 봅니다. 지금으로부터 49년 후의 나를 상상해 봅니다. 하루키 할아버지는 74세인 올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한국에 소개했어요. 적당히 마시고 적당히 달리고 적당히 웃으며 적당히 연민을 가지고 작은 이야기를 해 나가는 저의 85살은 어쩌면 하루키 할아버지의 74세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과 흡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언제 어디서나 괜히 하루키 할아버지 엮기)
그런 의미에서 85살의 나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하며 많은 사람이 이야기하지 않지만 꼭 세상에 필요한 이야기들을 찾아내어 조금이라도 그것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읽고, 듣고, 대화하고, 몰입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기에 지금부터라도 더 열심히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작고, 가깝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계속해야겠다는 용기를 갖게 해 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에 감사합니다.
불완전하고, 불편하고, 불안한 이야기를 마주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듣는 이야기와 보는 영화들과 책에 감사합니다(특히, ‘휴식북클럽’, ‘나위쓰(나를 위해 쓰기로 했다)’, ‘TEDxSeoul’, 그리고 나의 가족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들, 감사합니다).
2024년에도 2034년에도, 2074년에도 (대략 87살)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