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슬픈 외국어≫ 속 한 단락
그래도 배낭을 짊어지고 멕시코에 혼자 여행을 갔을 때는, 아주 기초적인 스페인 어 지식만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훨씬 좋았다.
- 무라카미 하루키, ≪슬픈 외국어≫ (문학사상사, 1996)
알아가는 즐거움,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가장 빠르고 유용하게 지적 호기심을 채울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이다. 나의 경우 성인이 되고 치러야 하는 생애 과업들 - 예를 들면 수험, 취직과 같은- 을 마치고 난 뒤부터는 거의 매년 외국어 학습과 관련된 목표를 새해 다짐 안에 적어 넣곤 했다. 특별히 달성해야 할 목표가 없더라도 자격증 시험을 본다든지, 여행을 가거나 학교를 다닌다든지 하여 일부러라도 목표를 만들어 내었다.
그렇게 어느 때는 이 언어, 어느 때는 저 언어에 집중하며 손가락으로 세자면 한국어까지 6개 국어가 가능한 셈인데, 사실 가능하다고 말하는 그 시점에 관심을 갖고 있는 언어를 기준으로 하자면 3개 혹은 4개 수준에 그치고 만다. 문제는 그렇게 많은 시간과 애정을 투자해 온 외국어 공부인데 해가 갈수록 ‘올해는 이 언어를 새로 배우고 싶다'는 의지는 같으나 막상 실제로 학습을 하고 목표를 세우고 실행하는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키의 경우 마흔이 넘고 앞으로 자신에게 유효한 시간이 어느 정도나 남겨져 있는가에 대해 슬슬 신경이 쓰이게 되자, 외국어를 배우는 일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한 작업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앞서게 되었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두려워진다. 나의 바람과는 달리 앞으로 더 언어에 대한 관심은 사그라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조금 더 어렸을 때는 순수한 즐거움으로 언어를 배웠었는데, 지금은 자꾸만 실리를 따지게 된다. 지금 내가 투자하는 시간이 미래의 나의 커리어에, 명예에 어떤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 줄지에 대해 계산하게 된다.
영어나 일본어는 활용도가 높기에 꽤 오래 붙잡고 있지만, 프랑스어, 중국어, 스페인어의 경우는 일상에서 필요한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꾸만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게 된다. 생존의 문제를 초월할 만큼의 순수한 즐거움을 주지 않는 이상 계속 이어가기 점점 더 어려워진다. 실리적인 인간이 되어간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단순히 먹고살기 힘든 삶을 살고 있다고 봐야 할까. 이쪽도 저쪽도 개인적으로는 씁쓸한 모양이지만.
아직까지는 계속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싶은 욕구가 있다 (언제나 중요한 건 실행이지만). 새해의 목표에도 외국어 학습 계획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이미 나는 몇 년 후 10개 국어를 할 줄 안다고 말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고 있다. 지적 호기심, 지적 허영의 건강한 발현, 그런 것을 상상한다.
반드시 실용적인 목적이 아니더라도, 외국어를 배울 때의 순수한 기쁨이 있다. 비슷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다른 상징, 기호, 그 속에 담긴 역사, 문화의 차이. 더 들어가 그 기호가 한 나라의, 한 언어권의 어떤 집단 무의식으로부터 출발했는지 상상해 보는 즐거움. 적다 보니 나의 행복에 외국어 학습이 차지하는 크기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기호와 귀에 들리는 음성 그 자체를 음미하는 감각적인 즐거움, 그리고 감각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는 즐거움까지.
행복이 몰입하는 기쁨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맞다면, 나의 행복은 외국어에 큰 빚을 져오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해야 하는 일(이라고 믿는 일)들을 좇느라 잠시 나의 가장 사적인 행복을 미뤄오진 않았는지도 반성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는 3년째 붙들고 있는 스페인어 기초 떼기를 (정말로) 해내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