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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학원에서 3시간 그림 그리며 키우는 메타인지

그림을 그리며 나 자신을 배웁니다.

by 하마생각

포닥을 시작하면서 등록한 미술학원에 다닌 지 7주 차가 넘어간다.

(벌써 7번이나 갔다..!)


미국에서 박사를 하면서 한국인들과의 모임, 더 정확히는 교회모임 말고는 활동을 해본 적이 없지만, 포닥을 하면서는 나 스스로의 알을 깨고자, 그리고 좀 더 미국사회에 스며들고 싶은 마음에, 미술학원을 등록했다.


미술학원 등록에 이런 거창한 이유까지 대는 게 웃기지만, 영어가 능숙하지 않고 소심한 성격의 나로서는 미국에서 어떤 활동을 시작한 것은, 정말 큰 용기를 낸 것이다. 워낙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미술학원이라면, 미국인들에 둘러싸인 상황이라도 졸지 않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술학원 첫날에는 나를 포함한 5명의 신입생들이 모였는데, 재밌는 건 3명(남)은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또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IT 쪽 일하는 사람이었고, 나 말고 다른 여자분은 심리학상담가였다. 아무튼 그렇게 뻘쭘하게 5명이 모여서 둘러앉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자기소개도 돌아가면서 (버벅대며)하고, 미국인 특유의 말하는 것 좋아하는 미술선생님의 그의 선생님이 된 역사에 대해 듣고, 미술학원 투어도 한 다음, 수업을 시작했다.


첫 수업은 조금 당황스러웠는데.. 그 이유는 이제껏 다녀본 미술학원과 스타일이 정말 달라기 때문이다. 가볍게 취미미술을 하러 갔는데, 수업에서는 자신이 고른 석고상을 가져가서 이젤 옆에 걸어놓고, 테이프로 그어놓은 선 뒤에 (이젤에서 세 걸음 뒤쯤) 서서 팔을 90도로 쫙 뻗어서 실로 석고상의 위치를 (눈으로) 재고 이젤에 있는 스케치북에다가 그 석고상의 위치에 점을 찍어가며 석고상을 따서 그려내야 했다..! 첫날에는 팔을 뻗어서 석고상 위치를 재는 것에서부터 뭔가 익숙지 않고 어떻게 해야 되는지 감이 안 잡혀 점 한 10개도 못 찍고 끝났던 것 같다,


첫 수업 끝나고 다들 소감은 '그림 그리는 거 재밌네!' 이런 느낌이 아닌 '웨이트트레이닝한 것 같이 몸이 쑤신다ㅠㅠ'였다. 아무튼 그렇게 의문스러운(?) 첫 수업을 마치고, 매주 토요일마다 눈과 바람을 뚫고 미술학원 다닌 게 벌써 7주 차가 넘어간다.


미술학원을 다니면서, 지금까지 느낀 점은,

1) 토요일 고정적으로 할 게 있는 것이 주는 안정감이 생겨 좋았다. 매일 학교 컴퓨터 앞에 앉아서 거의 홀로 고행하듯이 연구활동을 한 뒤, 주말에는 그래도 내가 온전히 나의 취미를 위해 시간을 내고 집중할 수 있다는 즐거움이 생겼다. 덤으로 주말에 무슨 계획 있어?라고 물어보는 동료들의 질문에 "아, 나 미술학원 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생겨 다행이다. (아니면 매주 똑같이 "어, 나 집에서 청소하고 책볼거야."라고 뻔하고 심심한 대답을 할뻔했다.")


2) 그리고 옆자리 언니 (나이를 모르나 일단 언니라고 하고 본다.)가 심리 상담가하는 사람인데, 옆자리에서 맨날 나에게 "와우 너 진짜 잘 그렸다!" 혹은 "지금 기분이 어때?" 등등 계속해서 나에게 무료로 심리상담 혹은 심리 care를 해주는 그런 상황도 미국에서 고립된 삶을 사는 나에게 오아시스의 물처럼 반가운 순간들로 다가왔다. 그리고 또한 선생님과도 "이다음에 뭐 해야 돼요?"라고 물어보고 해야 해서, 나를 반 강제로 영어로 말해야 하는 환경에 노출시킬 수 있어서 좋았다. 이런 상황 아니면 주말에는 영어 한마디도 안 하고 지나갈 때도 많았을 것 같다.


+참고로 내 옆에 있는 심리상담사 언니는, 우리 동기들이 작품을 끝낼 때마다 엄청나게 칭찬해 주고, 손뼉 쳐주고 한다. 역시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사람이라서 다르다고 느꼈고, 언니 덕분에 우리 수업이 되게 훈훈한 시간이 되는 걸 느꼈다. 닮고 싶은 점이다.


3) 무엇보다, 그림을 그리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 탐구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선생님이 석고상 위치와 크기를 정확히 따서 스케치북에 옮기라는 디렉션을 주셨을 때, 당황했고, 실수할까 봐 주저했다. 나는 눈 석고상을 선택했는데, 눈꺼풀이나 이마의 주름같이, 뭔가 복잡한 모양의 위치를 때야 할 때는. 정확히 위치를 따지 못할 것 같다 미리 좌절감(frustration)과 불안감을 느끼는 나였다. 그런 나를 보고 선생님은 "언제든지 실수를 고치면 되니까, 마음껏 실수를 해! 실수를 하지 않으면 배우는 게 없어."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 말을 듣고 석고상의 위치를 딸 때도, 또 명암을 넣을 때도, 과감하게 내가 생각하는 최선으로 위치를 따고, 명암도 넣고, 그림자도 넣다 보니 그림이 점점 더 완성에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속으로 "아, 실수를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일단 해봐야 배우는 게 있구나."라는 깨달음을 느꼈다.


또 두 번째 깨달음은, 나는 무엇을 정확하게 해내고, 디테일을 완성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가끔 연구가 지루하거나, 성취감을 못 느끼거나, 아님 내가 연구에 자질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내가 왜 이 길을 선택했을 까 아오.." 이러고 한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연구자로서 갖추어야 할 중요한 자질 중 몇 가지는 갖추고 있다는 것을 그림을 그리면서 깨달았다. 하나는, 지구력이고 두 번째는, 완벽하게 하는 것 (디테일을 완성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내 수업의 다른 친구들은 4~5주 만에 그림을 완성하고, 다음 석고상으로 넘어갔는데, 나는 내 그림을 완성하는데 7주가 걸렸다. 그 7주 동안 한 작품에 매달려서 디테일을 완성하려는 나를 보고 나도 놀랐다. 그리고 또 그렇게 작은 디테일까지 똑같이 그려내려는 과정이 엄청 즐겁다고 느끼는 걸 보면서, "아, 나는 뭔가를 완벽하게 아님 정확하게 해내는 것에 엄청나게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이구나. " 이런 자세를 연구하는 데에 사용하면 적어도 "false leading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연구는 하지 않겠다.라는 생각이 드니, 먼 훗날에는 꽤 좋은 연구자가 될 수도 있겠다는 내적 자신감(?)이 생겼다.


이렇게 미술실력 + 자기 자신을 알아차리는 메타인지까지 키우는 그림 그리기 시간을 가질 수 있음에 새삼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eye.jpg 자랑스러운 내 첫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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