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경찰서장이면 말 다했다.
어디서든 대접받는 위치.
경찰서 사택 앞마당에서 테니스를 치던 분.
단지 A가 기억하는 건 언제나 멋쟁이 셨다는 것.
스파게티를 즐겨 드시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걸 즐기셨던 분.
외출할 땐, 셔츠를 입으시고 메달을 달았다. 재킷까지 갖춰 입은 후엔
애스콧 모자를 쓰시고선 소형차를 몰고 나가시곤 했다.
A가 방문할 때면 어느 날은 컴퓨터 앞에 앉아 고스톱을 치기도 하셨고 또 어떤 날은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함께 흔들의자에 앉아계시기도 했다.
커피를 좋아하셨던 A의 할아버지는 늘 하얀 머그컵에 아메리카노를 마시곤 하셨다.
덕분에 할머니는 디카페인 커피를 항상 팬트리에 구비해 놓으셨다.
A는 초등학교 3학년 때, 한 살 어린 사촌 동생과 함께 할아버지 댁에 방학 한 달 동안 있었는데
지금은 그때 뭘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항상 사골라면에 떡국떡을 넣어서 할머니, 할아버지, 사촌 동생과 먹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그 메뉴를 너무나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A의 엄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너무나 선명하다.
바로 A의 할아버지가 엄마의 아버지다.
"늘 함께 클래식 음악을 듣곤 했어. 너희 할아버지가 멋있는 분이시잖아. 늘 옷도 잘 갖춰 입으시고. 네 이모들도 계시지만 꼭 음악을 들을 때 엄마를 발등에 올려놓고 함께 춤을 추셨지. 아직도 기억나, 그때가."
어렸던 A는 그 말을 듣고 할아버지가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 정말 이야기 속이 아니라 현실에 있다는 게 좋으면서도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읽었던 세계 명작 동화 속에나 있는 백작님만 그런 줄 알았는데 A엄마의 아빠는 그런 사람이었다.
A는 자신의 아빠를 떠올렸다.
엄마는 그런 아빠가 있는데 왜 자기 아빠 같은 사람과 결혼했는지 의아했다.
할아버지는 개인 사진전을 열었던 사진작가이기도 했다.
가끔 할아버지가 찍은 옛날 연예인들 사진을 보면 의아했다.
경찰관이었는데 어떻게 사진을 찍으신 건지 궁금했다.
다행인지 운명인지 A의 큰 이모가 실력을 물려받아 사진작가가 되었으니
그 연예인 사진전은 진짜임이 분명했다.
할아버지는 A가 집으로 다시 돌아갈 때면 꼭 만 원씩 용돈을 주시곤 했다.
A는 그런 할아버지가 좋기도 하고 편하기도 했다.
특별히 심부름을 시키시거나 여느 옛날 할아버지들처럼 담배를 피우시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늘 커피 향이 났다.
할아버지는 금붕어 어항에 물을 새로 바꾸시고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주셨다.
그리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고스톱을 혼자 치시곤 했다.
헤어질 땐 항상 손으로 경례를 하시며 인사를 하셨다.
이젠 세상에 안 계신 할아버지를 가끔 생각한다.
할아버지는 말년에 치매가 와서 혼자 한 번씩 거리로 나가시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떤 날은 지갑이 텅 비어있거나, 다른 날은 즐겨하시던 캐시미어 머플러가 사라지곤 했다.
A의 이모들과 삼촌들, 그리고 엄마는 집에 요양보호사 선생님을 모셔와
할머니와 다 같이 할아버지를 돌보았다. 가끔 A는 할아버지를 자주 만나 뵙지 못한 자신이 싫었다.
영원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항상 외가댁 문을 열면 거실 한편에서 커피를 드시던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게 이상했다.
흔들의자는 이제 사라졌고, 할아버지의 흔적은 가족사진과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오던 감사장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A는 불현듯 깨달았다.
슬픔을 없애는 방법은 기억을 만들지 않는 것이라는 걸.
좋은 기억은 그 기억대로 어떤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슬픈 기억은 그 기억대로 마음에 남아있다.
부끄러운 기억, 속상했던 기억은 마음이 힘든 날엔 송곳처럼 솟아 나온다.
하얀 머그컵이
디카페인 커피가
백화점 진열장에 놓인 애스콧 모자가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날엔 차라리 어른이 된 후론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게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기억과 물건들이 뒤척거리는 날엔 갑자기 울음이 나왔다.
이미 그 기억들은 추억이 되고 있었다.
A는 생각했다.
슬픔을 없애지 말고, 그냥 흘려보내야겠다고.
억지로 담아놓은 물은 결국 둑을 부수고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자연스레 흘러 보내자.
생각이 나면 생각나는 대로, 잊히면 잊히는 대로.
세상엔 억지로 해야 하는 노력도 있지만
때론 시간의 흐름에 맞춰야 한다는 걸 A는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