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가 된 지 일 년째다.
집에서 일을 하기도 하지만 이사를 하면서 모든 것을 비워내던 시기였다.
안 보던 책도 버리고
더 이상 찾지 않는 물건도 다 버려버렸다.
덜어낸 만큼 마음은 가벼워졌다.
마지막으로 2년 정도 몰던 중고차를 폐차시켰을 땐 마음이 홀가분했다.
운전을 급하게 배웠던 터라 늘 허겁지겁 운전하면서 각종 사고를 경험했다.
점점 두려워졌다.
운전대를 잡는 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던가. 신경 쓸 것 하나(자동차세, 유류비, 자동차 보험, 주차비, 주차공간 찾기)를 덜어내니 이젠 기동력이 문제다.
여유있을 땐 버스를 타고 시간을 아끼고 싶을 땐 택시를 탄다.
돈보다 시간이 더 소중해라는 얄팍한 소신을 갖고 있기에 과감히 택시비 결제를 선택한다.
그날은 아이들과 시댁에 가는 날이었다.
택시를 타자는 내 말에 큰 아이는 버스를 고집했다.
엄마랑 동생이랑 버스 타고 할머니댁 가는 게 내 로망이라고요.
어머 참 소박한 중2의 로망이로구나. 그래 어서 버스를 타자꾸나.
내 마음대로 아이들과 뒹굴고 싶은 로망을 팽개쳐둔 채 길 건너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검색만 하면 그 만인 버스 도착 시간을 아이는 나름 열심히 산수 머리를 써본다.
45분에 한 대씩 오는 버스.
12시 25분에 도착할 거라는 믿음으로 출발을 선언한다.
5분 정도 오차는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완전한 시골도 도시도 아닌 위치에 있는 시댁은 지역에서도 관리하는 한옥 마을이다.
자차로 20분 버스로는 45분은 걸리는 거리.
아들아, 이 어미는 왜 짜증이 스멀스멀 나지.
아빠가 없는 일요일엔 너희들과 도서관에 가고 싶단다.
나오는 길엔 햄버거 하나 입에 물고 수다도 떨고, 아니면 영화관이나 서점에 가고 싶단다.
사실 속마음은 너희들과 밀린 숙제를 하고 싶기도 해.
합법적으로 쉬는 일요일엔 더 뒹굴고 싶어.
버스는 20분이나 더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애먼 짜증을 내본다.
택시를 탈 걸 그랬다. 사실 오늘 안 가도 되는데 할머니 댁에 가는 거다. 엄마는 나의 의지에 반하는 이런 상황이 싫다.
엄마, 일단 타봐요. 시골 가는 버스라 재미있어요. 할머니들이 타시는 버스라 진짜 친절하시다니깐요.
막상 버스를 타고 하늘을 보니 하늘이 푸르다.
햇빛이 따사로워 마음이 몽글몽글 해진다.
바람이 간질간질 조금은 속도 시원해진다.
맨 뒷좌석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두 아들 녀석의 모습이 여전히 귀엽다.
가방엔 게임용 패드와 학습지도 챙겼고, 먹을 과자도 야무지게 넣어놓은 아들들이 상황에 마냥 짜증 내는 엄마보다 더 낫게 느껴진다.
아들아, 넌 계획이 다 있구나.
뾰족했던 마음이 점점 녹아내리고, 가슴이 뚫리기 시작한다.
적당히 달리는 버스의 속도. 할머니들의 대화 소리. 친절한 기사님의 버스에 탈 때마다 인사해 주시는 목소리.
문득 대학시절 학교에 갈 때 항상 탔던 28번 버스 기사님이 떠올랐다.
유독 학생들이 많이 타던 버스였는데, 늘 먼저 반갑게 인사해 주시고 어른들에겐 친절하셨던 그 태도, 목소리.
일을 하려면 저렇게 해야겠구나 생각 들게 했던 어른.
어쩌면 시골 버스에 올라타면서 들린 기사님의 목소리가 불퉁한 마음을 침착하게 만들었을까.
시골 읍내의 간판이 보인다.
마을 정화 사업으로 간판이 깔끔하고 멋들어진다.
'번창 슈퍼'는 'BC마트"로 이름도 바꾸었다.
바로 옆에 식당도 있어서 장사도 잘된다.
시부모님 얼굴을 보니 마음이 한결 낫다.
며칠전 여행을 다녀오신 어머니는 마당에서 수선화를 심고 계신다.
아버님은 여전히 부지런히 나무를 오토바이로 나르신다.
올해 포도랑 사과도 잘 여물겠다며 좋아하신다.
그래, 나이 들어 우리 시부모님만큼만 살아도 인생 성공이다.
평범한 게 가장 어려운 거니까.
양손 가득 반찬을 챙겨 들고 씩 웃음 지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