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여러분, 친구 서너 명이 만나 밥 먹으러 갈 때도 뭘 먹을지 정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리곤 하죠? 서로 양보하는 의미도 있지만 실상은 자기가 무엇을 먹고 싶은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아무것이나 괜찮다는 심리가 강하게 작용하기도 하지요. 결국 " 돈은 내가 낼 테니 메뉴는 니들이 정해라! " 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먹고 싶은지조차 모르는 사람, 이건 '죽은 사람'입니다.
최진석 작가의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한 대목을 읽고 아하 소리를 감출 수 없었다.
누군가 정확히 나를 보는듯한 느낌.
한국인이라면 느꼈을 일상의 생각이 결국 보편적인 생각이었단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북클럽 도서로 선정되면서 내심 읽고 싶었던 책이라 반가워하던 참이다.
입말체로 술술 읽히는 인문학 책이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고명환 작가의 추천 도서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 읽고 싶던 책이다.
작가는 계속 가벼운 촌철살인의 문장을 서술한다.
'아무거나'라는 안주가 호프집 히트 안주일 수밖에 없는 이유.
'~한 것 같아요'라는 말을 내뱉는 우리들의 말습관까지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들을 쏟아낸다.
너무나 나에 대해 불확실한 상태여서 '식욕'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욕구조차도 '추측' 해야 하고 불확실한데, 자기가 뭐 하고 싶은지, 지금 뭘 원하고 있는지를 어찌 생각할 수 있느냐며 열변을 쏟아낸다.
과거의 '아무거나' 안주를 먹던 나는 그 시간에 친구들과의 만남이 즐거운 사람이었고, 먹고 싶은 음식은 많으나 다양성에 기인하여 안전주의적인 시도로 '아무거나'를 시켰는데, 지금 술 한잔을 하러 간다면 많은 안주 중에 고르는 게 힘들어서 혹은 지난 추억 때문에 필시 시켰으리라. 생각해 보면 평범한 사람의 결혼이라는 건 인생의 하나의 기점이 된다. 넉넉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의 삶의 변화는 꽤 희망차다가도 끝도 없는 혼자만의 우울감에 빠져들게 됐는데 그럴 땐 마치 없는 살림에 자식을 키워내야 하는 여자인 양 코스프레를 한 것이다. 돌아보니 그렇다. 아이가 중심이 된 생활은 상상 못 할 행복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나 자신을 잠시 보지 않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점점 나의 입맛을 잃어갔다고나 할까. 아이가 잠들면 밤새워 보던 드라마도 영화도 시들 해질 즈음엔 정말로 입맛까지 뚝 떨어지고 말았다.
좋아하는 드라마도 더 이상 없고, 먹고 싶은 음식도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빵을 좋아하던 빵순이 었던 내가 그마저도 잘 먹지 않았다. 정말로 허기를 느껴서 먹는 그런 식사인 것이다.
나중에야 알았다.
애타게 기다리는 드라마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거, 좋아해서 꽂히는 노래쯤은 흥얼거려야 한다는 걸.
'내'가 인생에서 빠지니 김 빠진 탄산음료처럼 맹숭맹숭한 단 맛만 남아버렸다.
톡 쏘는 나만의 맛을 찾으려면 이산화탄소가 필요하다. 단, 그 이산화탄소는 내 입 속의 수분과 만나야 잘 발현된다. 마음속 욕망과 의지가 있어야 나만의 탄산음료를 만들 수 있다. 톡 쏘는, 마시기만 해도 아 그 맛이구나 할 수 있는 그것.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소설을 읽기 시작했는데, 소설을 읽으면서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된다는 말을 듣고 옳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인풋의 양이 부족하여 다 이해하기는 힘들다. 자로 잰 듯 사람의 마음이나 감정이 보이진 않는다. 괄목할만한 성과는 내가 '다시 소설을 읽는다'라는 사실이다. 외면하고 싶은 현실로부터 혹은 알고 싶지 않은 진실로부터 회피하던 지난날을 조금씩 드러내고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발맞춰 영화를 보며 '감정 느끼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온전한 나의 소망을 찾아 완전한 나로 살기 위한 항해는 지속 중이다.
나를 돌아보지 않았을 때의 결과는 꽤 참혹하다.
남이 바라는 대로 살게 되며
남이 시키는 대로 조종당하며
남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된다.
나를 드러내는 일이 언제부터 두려워졌을까.
인간은 "내가 나인가?" 하는 질문을 항상 해야 합니다. 내가 나 아닌 다른 것의 노예로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항상 자기한테 해야 돼요. 삶은 자기가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타적이든 이기적이든 삶의 활동성은 오직 자기에게서만 비롯됩니다. 자기를 버리는 일마저도 '자기'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과 자기 내적인 활동성과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사는 일이 불안하고 피곤하며 뭔가 고갈되어 가는 느낌이 들고 총제적으로 재미가 없습니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 by 최진석
내 동생은 내가 때려도 남이 때리는 건 못 참는다는 논리처럼 나를 버리든 챙기든 그건 나만이 몫. 나는 나만의 것이다. 그동안 왜 이렇게 헤매나 했더니 '나만의 무늬'를 그리느라 그랬나 보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면서도 반대편에선 남을 위한 삶, 남을 말을 듣는 삶을 살고 있는 나. 욕을 먹기 싫어서인가 착한 척하고 싶은 욕망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용기가 없는 것인가. 아직도 인간의 무늬를 그려야만 하는 때이다. 끄떡없을 나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