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펼친다.
봄의 조팝나무처럼 새하얗던 엘지그램 16인치 화이트 노트북은 이젠 제법 손때가 묻어있다.
'ㄷ'자 자판이 가끔 잘 눌러지지 않거나 'ㄷ' 이 필요한 순간 빨리 화면에 나오지 않는다.
안 돼.
아직 이 노트북으로 책 한 권 못써봤다고, 아직 나를 떠나면 안 된단다.
수업용 노트북은 어느새 수업과 글쓰기를 동시에 감내해야 하는 엔잡러가 되어 버렸다.
공모전에 제출한답시고 앉아있는 이 밤, 따듯한 아메리카노 한 잔에 기대어 퇴고 중이다.
일생에 하지 않던 퇴고를 하는 것이다.
갑자기 살짝 거슬리는 일이 생긴다, 어서 퇴고를 해야 하는데 말이다.
노트북 자판만큼이나 잔잔하게 신경 쓰이는 것이 손톱이다.
그새 자란 손톱을 자판을 치는 나의 동작을 교묘하게 방해하고 있다.
글을 쓰는 손 맛이 생기지 않는다.
우리 집에서 제일 잘 나가는 분홍색 손톱깎이를 가져와 엄지 손가락부터 살포시 자르려 했는데, 아뿔싸.
부품 하나가 포물선을 그리며 튕겨나가더니 이내 조용히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또 내가 손톱깎이 부쉈다고 말하며 놀릴 남의 편을 생각하니 벌써 약이 오른다.
이런 일을 예상한 것처럼 화장대 칸칸이 서랍에 감춰둔 작은 손톱깎이를 가지고 놔와 두루마리 화장지 한 칸을 냉큼 툭 뜯어냈다.
반듯하게 자르고 오니 자판을 치는 소리가 부드럽고 걸리는 게 없다.
일상의 미세한 일들이 정신을 지배하는 때가 가끔 있다.
약간 자라서 걸리적거리는 손톱.
갑자기 뽑혀버린 공동욕실 샤워헤드.
아주 작디작은 그 어떤 것이 일상의 작은 균열을 만드는 순간이.
해결하면 별거 아니지만 그전까지 걸리적거리는 무엇.
부디 오래 가져가지 말고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하기를 추천한다.
3주 뒤 타야 하는 비행기표.
입금해야 하는 공과금.
밀린 다이어리 쓰기.
써야 하는 글.
몇 자 적었으니 이제 정말 해야 할 일을 하러 가야겠다.
노트북의 생명이 다하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