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적 사고 feat. 세바시 진서연
예전에 한 사람이 벼룩을 유리병에 가두었다.
벼룩은 가볍게 뛰어올라 유리병 밖으로 나왔다.
다시 잡아넣으면 금방 뛰어올라 나왔다.
그래서 이번엔 뚜껑을 닫아놓았다.
역시나 밖으로 나오려고 뛰던 벼룩은 뚜껑에 계속 부딪히는 경험이 반복하게 되었다.
이후 뚜껑을 열어놓았을 때도 벼룩은 딱 뚜껑 높이만큼 밖에 뛰지 않았다.
많이 들어보았던 벼룩 이야기다.
한계 따위야 그까짓 거 넘어버리면 되지 하며 뛰어오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딱 그만큼 길들여진 사람이 있다.
두 가지가 다 공존하는 게 나란 사람이다.
타고난 성정은 분명 우주를 뚫고도 남으나 자꾸 주변의 말에 흔들리는.
이전 글에서 물과 같은 사람이라 말한 적이 있는데, 단점도 분명 작용한다.
어떤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나쁜지 아닌지 판단이 불가하달까.
물론 내가 만나는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특정 인물에게 취약하다.
인생에 너무나 영향을 끼치는 '어머니'라는 존재다.
결혼을 했으므로 나에게 어머니는 두 분이다.
친정엄마와 시어머니.
왜 친정어머니보다 친정엄마라는 말이 더 다가올까.
시어머니는 시엄마라고 하면 뭔가 어색하다.
한 달 전 두 분의 다툼 이후 물리적 거리 두기에 들어갔다.
몸과 마음이 바쁜 시기이기도 했지만
가운데에 끼어서 양쪽 어르신들의 말을 듣고, 중간자 역할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참 공교롭게도 시어머니 생신을 놓치고 찾아뵙고 난 이후 그때부터 한 달이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거나 분노를 지켜보고 감내해야 하는 것도 싫었고, 감정의 휴지통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나 한 사람을 똑바로 세우는 일에 집중하고 싶었고 올곳이 객관적으로 내 주변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내 생일도 결혼 후 처음으로 시댁 식구들과 함께 하지 않았다. 마침 참 많이 바쁜 탓이다. 스스로 만들어낸 일거리에 딴생각을 할 틈도 시간도 없던 탓이다. 이때 보게 된 영상이 세바시 진서연 배우 영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상은 친정엄마께 공유받았다.
내가 나의 엄마가 되어서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씻기도 돌봐주는 것.
그것이 자존감을 올리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
두 엄마를 탓할 것도 없고 그저 내가 나를 귀히 여기라는 말로 들렸다.
결혼 초 며느리 길들이기 시절의 초보도, 친정이 보고 싶어 애틋해하던 새댁도 아닌지라 감정 소모가 지나치게 들어가는 일을 피하고 싶었다. 여적 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감정이 이미 많이 소모되었다는 반증이지만.
비싼 음식이 아니어도 건강한 제철 음식을 먹고, 속옷부터 내 집부터 깨끗이 하고.
내가 나의 엄마라면 그렇게 둘 거야?
그런 사람 만나게 할 거야?
그런 경험하게 할 거야?
아니다, 그렇지 않을 거다. 엄마라면 그렇지 않을 거다.
'엄마적 사고'라는 말이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보다 더 다가왔다.
아기를 키웠던 어린 엄마가 생각났다.
지금은 나보다 더 커버린 아들을 보면서 이 아이를 키워낸 시간을 떠올렸다.
모성애라 불릴 수도 있지만 세상에 나오게 한 것은 내 책임이니 좋은 것, 귀한 것, 바른 것만 듣게 해 주고 보게 해주고 싶었던 그때가 떠올랐다.
내가 나의 엄마가 되어주는 일.
그게 뭐라고 그렇게 어려웠을까.
어쩌면 감정을 돌보기 시작하면서부터 내가 나 자신이 엄마가 되고 있었는지도.
진서연 배우는 새해가 되면 속옷 7벌을 새로 구입한다고 했다.
참 좋은 시작이다.
나에게 깨끗한 속옷부터 줘야겠다.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해야겠다. 본인을 스스로 귀히 여길 수 있도록.
딸들은 엄마의 감정여과기가 되기도 하지만 '엄마'라는 존재는 무한한 사랑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지 않던가.
부정일랑 접어두고 마냥 자신을 귀히 여겨보자.
값싼 옷 여러 벌 말고 원단 좋은 셔츠 하나, 인스턴트 말고 싱싱한 재료의 음식.
'엄마적 사고' 장착하기.
'간섭'말고 '관심'갖기.
'감정 쓰레기통'말고 '감정의 공유상자'되기.
당신이 당신의 엄마라면 그렇게 둘 건가요?
그런 말로 상처 줄 건가요?
그런 사람 만나서 몸과 마음을 다치게 아이를 놔둘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