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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합니다, 내 인생.

첫 번째 리셋.

by 마음돌봄

열 번째 다이어리 마지막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인생이여, 다시 한번. 이번생도 아닌 것 같아.'

선영이 매번 새로 태어날 때마다 혹은 인생의 어느 시점으로 갈 때마다 빼먹지 않고 하는 행동은 단 하나다.

바로 다이어리를 쓰는 것.

스마트폰이나 각종 기록앱이 있지만 다이어리를 쓰는 이유는 오로지 책 형태의 물성만 '시간의 고리'를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이어리를 하루도 빼지 않고 다 기록해야만 다음 생으로 갈 수 있는 자격 조건이 갖춰진다. 귀찮아도 선영이 다이어리를 썼던 이유다.

'시간의 고리'를 알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자주 가던 책방이 문을 닫던 날, 책방 할머니는 그녀에게만 '시간의 고리'를 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열한 살 때부터 방과 후엔 꼭 이 책방으로 향했다. 부모님은 늘 일 때문에 귀가가 늦었고, 엄마가 미리 준비해 준 간단한 식사를 하고 나면 선영은 학원 수업이 끝난 후 이곳으로 가서 책을 읽곤 했다. 어쩌다 한 번씩은 주인 할머니 대신 다른 손님들에게 책을 찾아주기도 했고, 카운터에 옆 의자에 앉아 잡지책이나 소설책도 실컷 읽곤 했다.



'선영아, 너한테만 알려주는겨. 네가 7년째 오고 있잖어. 너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다. 네가 가고 싶은 연도와 날짜, 요일, 시간을 다이어리에 쓰면 그때로 가서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마지막엔 '인생이여, 다시 한번.'이 말을 써야 하고. 상상만으로는 안되고 반드시 써야 한다. 꼭 찾아보거라. 네가 가장 행복할 인생을.'



그게 벌써 오래전일이다. 그 후로 선영은 한동안 잊고 지냈었다. 그저 할머니의 마지막 유언 같은 거려니 하고 생각했다.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었던 선영은 수능 성적에 맞춰 대학을 갔고, 동아리 선배들처럼 마치 의식인양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지만 이뤄질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IMF 직격탄을 맞은 국가의 공무원이었던 부모님은 딸이 안정적인 일을 하길 바랐다. 월급이 따박따박 나오고 인생의 굴곡이란 없다고 느끼는 일을. 사업을 하면서 갑작스러운 조류 독감이나 주식 폭락 등으로 영향받지 않을 일을 원했다. 대기업도 뿌연 안개처럼 사라지는 시국에 회사원이 되는 것도 가망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선영은 5년째 시험에 떨어졌고 이십 대 후반이 되었다. 지긋지긋한 마음에 콜센터 직원으로 취직했다. 매일 가던 도서관 열람실이 꼴도 보기 싫었다. 보이지 않는 고객님들의 욕이 섞인 목소리에 지칠 때쯤 남편을 만나 결혼했는데 아이가 생기지 않아 300만 원어치 보약에 시험관 준비까지 해야 했다. 다행히 아기를 낳고 육아와 일을 반복하면 살던 선영은 자신이 점점 방어적이고 일에 지쳐감을 느꼈다. 육아도 일도 결혼 생활도 끌려다니며 사는 것 같다 느낄 때쯤 불쑥 '시간의 고리' 생각이 났다. 왜 그동안 생각을 못한 건지, 아니 정말로 이게 시간을 넘나들긴 하는지. 안되면 그만 되면 좋고라는 마음에 가지고 있던 다이어리를 꺼냈다. 회사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주지만 투두리스트 정도로만 쓰고 있는 다이어리였다.


'2001년 대학에서 전과 신청할 때, 3월 7일로 가고 싶어. 시간은 오전 10시쯤?'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낀 선영은 웅성웅성대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선영아, 웬일이냐 네가 졸기까지 하고. 전과 신청 오늘 까지래. 너 할 거야? 아니면 복수전공? 결정은 한 거야?

"아, 어, 응. 나 전과하려고. 국문과에 가면 책이라도 실컷 읽겠지. 교직 이수도 하면 좋고."

"그래, 넌 뭐 도서관에서 사는 애니까. 난 어쩌냐, 일단 나도 너 따라갈 거야."

"정말? 이거 쉽게 결정할 일 아니잖아. 수진이 너 괜찮겠어?"

"응, 나도 뭐 성적 맞춰 들어왔는데. 이 대학 이 과가 일생일대의 목표도 아니었고 뭐.

책 많이 일고 글이라도 쓸 줄 알면 뭐라도 해서 먹고살겠지 뭐. 혹시 아냐? 나도 교직 이수하고 의외로 괜찮은 선생이 될지. 히히 안 그래?"






선영은 다시 만난 수진이 반갑기도 했고, 오랜만에 느끼는 캠퍼스의 공기가 낯설면서도 묘한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지브리의 음악처럼 추억,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에 대한 향수가 뒤얽힌 그런 느낌이었다. 익숙하지만 서정성을 느끼게 하는 그런 작은 물결 같은 것. 선영은 지금 이 순간이 꼭 그렇다고 생각했다. 로우라이즈 바지를 입고 있는 학생들을 보면서 낯설지 않은 기시감이 들었고, 교수님이 미리 읽어오라는 소설 과제를 읽으며 아직은 등장하지 않은 혜성 같은 작가들 이름이 떠올랐다. 김애란, 문지혁, 윤고은, 정세랑, 김초엽, 정보라, 장강명.. 그들의 글을 읽을 수 없다는 게 아쉬우면서도 이상했다. 다행히 한강 작가의 작품은 읽을 수 있었지만 나중에 노벨문학상을 받을 거라는 아무도 모르는 진실을 누설할 수는 없었다. 수진과 다시 같이 생활하는 대학의 일상이 즐거웠다. 그저 내 한 몸만 챙기고, 내 미래만 걱정해도 되는 순간이 다시 찾아왔다. 다시 만난 엄마 아빠는 당연하지만 훨씬 젊어 보였고, 묘하게 생기가 도는 딸의 모습에 전과한 것을 걱정하던 마음에서 안도감이 드는 마음으로 변했다. 교직 이수를 한다고 했으니 임용 고시를 보면 될 일이었다. 어려운 시험이어도 합격만 하면 여자로서 그만한 직장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학과 공부를 하는 틈틈이 선영은 신춘문예를 준비했다. 지금은 웹소설도 없는 세상이니까. 천리안, 나우누리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고 최근엔 <엽기적인 그녀>도 영화로 보고 왔지만 뭔가 아직은 자신이 없었다.


'나도 PC통신에 글을 써봐야 하나. <드래건 라자>나 <퇴마록> 같은 거, 아님 귀여니 소설 같은 거. 이미 이런 거 많은데 내가 쓴다고 될까.'


선영은 신춘 문예가 답이라고 생각했다. 이래 봬도 국문과 학생인데 뭐라도 쓰겠지. 영자 신문 동아리에서 나와 문예 동아리에 들어간 이유도 그게 아니던가. 콜센터에서 일을 마치고 퇴근하고 문예창작과 대학원에 가볼까도 했지만 피곤해서, 결혼해서, 애가 있어서, 이 나이에 뭐 하나 싶어서 포기했었다. 이번생은 가능하겠다 싶었다. 아직 스물한 살이니까. 혼자 몸이니까. 일단은 동아리에서 준비해 보자. 그때 시작한 작가지망생의 생활이 벌써 십 년째가 되었다. 나이는 어느덧 서른 하나다. 임용 고시를 준비한다는 명목아래 몇 년째 공부 중이고 틈틈이 소설을 써서 공모전에 출품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언제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질 수 있을지, 이번 생에서조차 콜센터로 가야 하나, 학원으로 아니면 아무 데라도 가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고 2011년 1월 신춘문예 발표가 있던 날 선영은 다시 다이어리를 펼쳤다. 부모님 얼굴을 보기가 더 이상 이 상태로는 힘들었다. 임용고시에 합격한 수진과의 어색한 사이도, 이미 취직한 남자친구와의 묘한 간극도 마음의 부담으로 다가왔다.






'인생이여, 다시 한번. 2003년 5월 2일 학생회관 앞으로 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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