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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돌봄 Jul 18. 2023

과민성 대장증후군

어렸을 때, 전근가시는 아빠를 따라 이곳저곳을 누볐다.

지금도 앨범 속 사진을 보면 꼭 보이는 건 오리 모양의 아기 변기

생후 8개월 그렇게도 설사를 했다고 했다.

24살 어린 엄마는 말간 보리차를 끓여서 밤새 먹이셨다.

사진 속 집은 대부분 옛날 기와집 마루였는데 꼭 밥을 먹다가도 변기를 찾았다고 했다.


배앓이를 수시로 하고 장이 약했지만 다행히(?) 먹성은 좋아서 건강했다. 하지만 여전히 화장실에선 시간이 꽤 걸렸다.

국민학교 4학년때는 집에서 15분 정도 걸어서 학원을 가야 했다.

당시엔 전 과목 학원이나 주산 학원이 유행이었는데 집 근처에는 학원이 없어서 엄마가 운영하시는 옷가게 근처 학원으로 다녔다. 

10분 정도 걸어갔을까. 

배에서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느낌이 안 좋다.

이건 급똥이다.

결국 최신 유행 쫄바지를 입었던 나는 쫄바지를 똥바지로 만들고 말았다.

집에까지 어기적어기적 걸어가서 뒤처리를 했는데 다행히 건강한 똥이다.

그날은 학원에 못 간다고 전화를 하고 집에서 보냈다.

지금도 느껴지는 건 별로 창피한지도 몰랐다는 거다.

학원 가는걸 꽤 좋아했는데 못 가서 아쉬웠을 뿐.


그 후로는 긴장이 되는 일이 있으면 배가 살살 아팠는데 막상 그땐 화장실을 가면 변비이거나

아예 물똥이다.

참 극단적인 장이다.

중학교 때도 짧은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다녀와야 한다는 불안감이 있어서 배가 더 아팠었는데

고등학생이 되어선 마음가짐을 바꿔버렸다.

쉬는 시간이 10분이건 15분이건 일단 화장실에 간다.

한 칸을 차지한다.

밖에서 친구가 아무리 두드려도 당당하게 말했다.

'옆칸으로 가. 나 오래 걸린다.'

마음을 내려놓으니 오히려 더 편해졌다.

긴장하지 않고 오로지 나의 자연현상에 집중했다. 


20대에는 나름 건강했던 것 같은데 30대 이후론 장이 더 예민해졌다.

제2차 대란은 시댁에서 집으로 가는 차 안이었다.

술만 먹으면 얼굴이 빨개지는지라 알코올보다는 안주빨을 세웠었는데 시댁에서 막걸리 맛을 봐버렸다.

막걸리에 비피더스 사과맛을 섞어서 처음 먹어본 그 맛이란.

요구르트나 사이다를 섞는 건 하수.

유산균 음료를 섞으면 고수.

술맛을 처음 제대로 느껴서 많이 마셨었다.

결국 남편 차 안에서 큰 아이를 앞에 아기띠로 맨 상태에서 청바지를 똥바지로 만들어버렸다.

이건 건강한 똥도 아니어서 아예 회생불가였다.


여전히 긴장이 되면 배가 살살 아프긴 하다.

변비와 과민성 대장증후군을 오가는 장 트라볼타이지만 이젠 그것도 괜찮다.

화장지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다.

가장 좋아하는 화장실은 대형 마트나 백화점 화장실이지만

수업 시간을 10분 남겨놓은 상황에서도

처음 가본 건물의 화장실도 다 갈 수 있다.

이것도 생각의 전환이라면 전환.

연륜이라면 연륜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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