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필요한 건 의지할 대상이 아니었다
요즘 신기한 현상을 하나 보고 있다. 바로 애완동물을 기르며 달라지는 자매의 모습이다.
그녀는 (내가 보기에) 부지런한 편에 속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얼마 전 한 강아지를 입양한 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침 7시에 강아지 밥을 주며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 8시까지 강아지를 돌보고, 심지어 매 끼니마다 자신의 음식을 요리해 먹는다.
중간중간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하는 것은 덤으로 추가되고.
나도 한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얘는 더 심하다. 정말로 하루 종일 움직이며 일을 한다. (지금도 부엌에서 북어콩나물국을 끓이고 있다;;)
아니 애가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사람들은 자기가 의지할 대상이 있으면 삶이 편해질 거라 생각하죠. 하지만 정작 실상은 그렇지가 않아요.
우리는 삶이 힘들 때, 의지할 대상을 찾는다. 이 사람만 있으면, 이 것만 있으면 내 삶은 다시 행복해질 거야.
그런데 인생은 그렇지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나에게 의지하는 대상이 있을 때, 우리는 더 힘을 내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힘으로, 자신의 나머지 인생까지도 개척해 나갈 힘을 얻는다. 마치 아이를 기르며 더 힘을 내는 엄마들처럼…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잠재되어 있는 삶의 의미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 내면이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적 특성을 나는 ‘인간 존재의 자기 초월’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 말은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 혹은 그 어떤 사람을 지향하거나 그쪽으로 주의를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성취해야 할 의미일 수도 있고, 혹은 그가 대면해야 할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잊으면 잊을수록(스스로 봉사할 이유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통해)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166p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에세이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 빅터 프랭크 박사. 정신과 의사인 그는 그 혹독한 환경에 들어가 ‘로고테라피’라는 심리 치료 기법을 개발한다. 프로이트와 융의 계파를 잇는 제3의 정신치료 학파로 불리는 로고테라피. 그는 그 시련을 통해 인간은 과거의 상처를 해석하는 과정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와 방향성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심리치료는 결국 이 질문에 답하는 학문이다. 그 ‘무엇’을 추구하게 만들기 위해, 과거의 상처를 보듬고 불안을 해소하고 자신감을 심어준다.
자매가 애완동물을 기르며 부지런해졌다는 것. 그것이 ‘삶의 의미’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그냥 좋아하는 것을 함으로써 조금 더 많이 움직이게 되었다는 것 아닌가?
최근 그녀와 강아지 양육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또 다른 차원의 관계에 접어들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공동의 목표, (강아지가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을 위해 달려가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우리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었다. 양육법에 차이가 있어서 싸울 때에도, 결국 싸움의 원인은 ‘네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를 따지는 마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럴 때 필요한 건 황급히 방향키를 돌리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우리 중 누가 맞냐 틀리냐가 아니잖아. 그저 이 아이가 우리 집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거지. 우리는 그 도구 중 하나일 뿐이고.
이렇게 문제의 본질을 다시 되새기고 나서야 이 철없는 싸움은 끝이 날 기미를 보인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이내 서로에게 먼저 미안하다고 이야기하고, 각자의 방법을 존중하는 해결책을 모색해 보기도 하는 용기가 생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분투 끝에 결과적으로 얻게 되는 것은 강아지의 행복이 아니었다. 바로 우리 자신의 행복이었다.
집에만 들어오면 강아지가 짖는다는 것. 동생과 싸워야 한다는 것. 그렇다고 혼자 살 수도 없고 혼자 살기도 싫다는 것. 그야말로 ‘답이 안 보이는’ 이 상황 속에서 조금씩 해결의 실마리가 풀려갈 때. 그리고 그 실마리가 풀리며 혼자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공고한 ‘우리 집’이라는 것이 만들어져 간다는 것이 느껴질 때. 우리는 점점 삶을 헤쳐나가고 있다는 성취감과 안정감을 얻게 됐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속에서 강아지의 행복은 저절로 따라오게 됐고.
이것이 로고테라피의 핵심이다.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행복하게 하는 행위. 즉 ‘의미 있는 행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은 궁극적인 나침반을 얻게 되고, 그 나침반 아래에서 결국 가장 행복해지는 것은 그 다른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
책임감, 의미, 이렇게나 무거운 단어들이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행복을 줄 수 있는 열쇠였다. 그런 의미에서 심리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젠가는 내담자가 이 무거운 단어를 통해 행복을 맞이하는 순간을 계속해서 늘려가게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걸 깨닫고 있다.
잠깐 강쥐 자랑좀 하고 가실게요 ㅠ
p.s)
이런저런 것들을 깨달으며 천방지축의 하루를 보내는 요즘.
이 아이는 이상하게 내가 방에만 나오면 짖어댄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게 너무 미워서 동생과 강아지를 원망했다. 이것들이 나를 왕따 시켜!
요즘 우리의 목표는 강아지가 소음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줄이는 둔감화 훈련을 하는 것인데, 정작 둔감화가 되는 쪽은 나라는 것을 알게 됐다. 처음에는 강아지가 짖으면 함께 짖어댔지만 이제는 그래… 강아지가 짖을 수도 있지… 하며 점점 익숙해지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동시에 아이를 기르는 엄마가 왜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지 이해하게 되어 버렸다. 아직 미혼인 내가 벌써 이해할 필요는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