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함이 고마워지는 시간

변화가 설레던 나이, 정착이 고마운 나이

by 마인풀 라이프

20대와 30대에는 이사가 두렵지 않았다.
짐도 많지 않았고, 캐리어에 몇 벌만 챙겨 문을 잠그고 나오면 그만이었다. 어디든 새로운 곳으로 가면 또다시 일상이 만들어졌다. 공항을 떠나는 느낌, 도착지 공항에 발을 디딜때의 그 떨림, 신나는 마음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시절의 나는 움직임 자체가 가벼웠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사 이야기가 나오면, 설레기보다 숨이 막힌다. 지금 사는 곳이 그토록 좋아서가 아니다.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짐이 된 물건, 짐이 된 기억


이제 내 짐은 단순히 옷가지가 아니다. 가구, 주방 도구, 책, 앨범, 아이의 장난감과 옷가지들, 하나하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이다. 짐을 싸는 건 단순히 물건을 옮기는 게 아니라, 삶의 조각들을 옮기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짐은 물건만이 아니다. 여기서 만든 인연, 아이가 다니는 학교, 동네의 작은 슈퍼마켓, 단골 카페, 익숙해진 길. 모든 것이 짐처럼 무겁다.


관계의 무게


20대의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대학, 직장, 여행… 어디서든 친구가 생겼다. 서툴러도 괜찮았고, 웃으며 금세 가까워졌다.


하지만 40대의 나는 안다. 새로운 친구를 만든다는 것은 노력과 시간, 그리고 깊은 진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쉽게 맺어지지 않고, 유지하기도 힘들다. 지금의 친구들과 안정된 관계를 이어가는 것만도 버겁다. 그래서 이사로 인해 쌓아온 관계가 흔들릴까 두렵다.


가족의 자리


가장 큰 무게는 가족이다.
아이에게 이사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이제서야 적응한 학교를 다시 옮길 생각하니 앞길이 깜깜하다. 내 선택 하나가 아이의 삶 전체에 파문을 일으킨다. 예전엔 내가 살 곳만 결정하면 되었지만, 지금은 가족 전체의 삶을 함께 옮겨야 한다. 책임감이 나를 더 무겁게 한다.


정착이 주는 고마움


돌아보면, 이 동네에서 지낸 지난 4년은 작은 안정이었다.
자주 가는 카페, 이웃과의 인사, 아이가 뛰어노는 놀이터, 집 앞의 나무들. 소소한 일상들이 쌓여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막상 살 때는 불평이 많았다.

날씨가 너무 더워 못살겠다고, 뉴욕에 비해 할 것이 없다고, 늘 불평할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막상 떠날 생각을 하니 아쉬움이 더 크다. 자주 가던 카페,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던 이웃, 함께해준 친구들, 그리고 날마다 운전하던 익숙하고 편안한 거리까지—그 모든 것이 이제는 그리움으로 남을것 같다.


20대의 나는 변화가 없으면 지루해했다.
30대의 나는 변화가 곧 성장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40대를 앞둔 지금은 다르게 느낀다.


지루함이 오히려 고마운 나이.
나는 이제야 새로 보게 된다. 정착의 의미를.

그리고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정착의 편안함을.

어쩌면 40대는, 그 고마운 지루함을 배워가는 나이가 아닐까.

keyword
이전 05화소비자의 30대, 창작자의 40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