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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국 엄마달팽이 Feb 20. 2021

[13일 미션] 나의 잡지들: 내 생의 흥미의 흐름.

[종이신문, 종이 잡지] 20일간 글쓰기 모임

미션: "신문의 여러 섹션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읽게 되니 전체적인 흐름을 읽게 되는 능력이 생긴다고 할까요? 하나의 주제뿐만 아니라 여러 주제를 하나로 연결하는 추상적인 생각의 조합법까지 터득하게 되고요."


"종이 신문을 열심히 읽고 서로 다른 기사들을 연결하려는 연습을 반복하다 보면 새로운 통찰력이 생긴다고 합니다. 현상에 숨은 본질을 읽는 눈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런 것을 바로 추상적인 사고라고 부릅니다. 전체 흐름을 객관적으로 조망하면 전체가 하나의 의미로 모아지게 되는데, 그런 것을 추상적인 생각, 이라고 하는 것이죠."


(중략)


"종이 신문이나 잡지 한 권을 읽습니다. 읽은 페이지를 사진으로 인증하고, 느낌을 짧게 들려주세요."


-공대생의 심야서재, 이석현 글-




잡지.

지난 세월 함께한 잡지들이 책장에 꽂혀있다. 회사 프로젝트를 따라 이동을 많이 한 이유로, 이사를 다닐 때마다 늘 책이 무서웠다. 몇 권만 되어도 무거운 그 글자들 군집. 짐이 많아지는 게 싫어서 결국 책은 책방에서 읽고 오는 걸로 바꾼 지 꽤 되었지만(뭐 많이 읽지도 않으니), 몇 권의 잡지는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다니고 있다. 세월이 이만큼 흐르니 그 몇 권들의 존재가 참 재미있다.


여행을 갈 때마다, 하는 행동이 있다. 여행지에서 들을 음악 앨범 하나를 정하고, 읽을 책을 하나 정하고, 그곳에서 책을 하나 사 오기도 하고, 뭐 그런 식이다. 음악과 책 구절 속에 그때의 시간과 느낌을 담아오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여행지에는 시집만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시 한 편으로 한 장소에 오래 머물러 시를 음미하니 아주 좋았다. 스토리나 정보가 아닌 느낌으로 담아오기에 시 만한 것이 없다고 느낀 뒤 굳어진 행위이다.)




그래서, 내가 산 잡지는 무엇?


20대 산 잡지는 가구와 인테리어 잡지. 인테리어에 관심이 있다기보다, 동양과 다른 서양의 가구와 집 구조에 관심을 끈 잡지였다. 이케아를 알기 전이었고 인테리어는 더더욱 모르던 때라, 모든 가구가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모든 페이지 속 공간을 메우는 빛과 가구의 색감에 반해버렸다. 무채색 열성팬이지만 그 무채색마저도 세련되고 편안한 '톤'이라는 것이 제각각임을 그때 알았다. 모든 색채가 아름다웠다. 모든 빛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색채를 담아내는 가구의 선들이 아름다웠다. 결국, 대학 졸업, 대학원 준비 중 유일하게 면접이란 걸 호기심 삼아 두 번 본 회사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가구회사였다. 합격 통지를 받았지만 거절했다(거절한 이유에 친구들 선배들 다 박장대소 하긴 했는데, 또 다른 회사인 광고회사에서 연락이 왔기 때문이라고 둘러대 본다.). 만약 그때, 그 가구회사로 들어갔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늘, 가보지 못한 길은 신기 궁금 투성이다.


30대 산 잡지. 캐나다에서 산 서핑 잡지다. 서핑을 알게 된 건 30살을 앞둔 해로 거슬러간다. 운 좋게 회사 프로젝트들 사이 한 달의 구멍이 생겼다. 신의 자식이 아니면 불가할 프로젝트 사이 공백! 무급휴가라도 완전 땡큐인 그 공백이 우리 팀에 떨어졌다(그것도 유급으로다가). 나는 친구가 있는 호주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우리 둘은 서핑 보드에 한 달을 실었다. 저질 체력, 운동은 죽어라 싫어하던 내 친구, 호주 전지훈련 특급으로 받고 왔다며 체력이 늘었다고 회상하는 우리의 한 달. 특급 유격훈련 스케줄은 다음과 같았다.


1. 아침에 눈뜨면 물 한잔 마시고 선크림만 바른 채 서핑 보드 들고 해변으로 출동.

2. 두어 시간 몸을 날리고 들어와 씻고 밥을 먹고 다시 취침 두 시간.

3. 오후에 일어나 다시 세수를 하고 점심을 만들어 먹고 다시 서핑, 해변 출동.

4. 두어 시간 놀고 돌아와 저녁을 준비.

5. 저녁을 먹고 드라마 시청. 친구가 추천해서 한 달간 본 시리즈, 섹스 앤 더 시티. (드라마 광인 친구였고, 드라마 안 보던 나였는데, 그렇게 드라마를 배웠다.)

6. 그리고 밤이슬이 내리면 다시 밤 취침.

7. 다음 날 아침, 일어나면 물만 마시고 선크림 바르고 다시 Gold Coast, Nusa Beach, Austrailia 바다로 고고씽.


그렇게 딱 한 달, 30일을 살아냈다. 별이 쏟아지던 호주의 해변가 밤. 마지막 날 밤 그 해변길을 걸으며, 친구와 나는 눈물을 훔쳤다. 꼭 10년 뒤 다시 이 곳에 와서 쏟아지는 별빛을 맞이하자고. 그러나 우리는 딱 10년 뒤 호주가 아닌 영국에서 함께 했다. 각자 딸아이를 하나씩 대동하고. (우리 둘, 결혼은 안 한다 했었고, 진짜 안 할거 같다고 주변인들도 믿었던, 제대로 혼자 잘 살 여인들이었는데 말이다...인생 참, 몰라.)


우리를 태운 골드코스트, 누사 비치. 호주.


그렇게 나는 서핑을 좋아하게 되었다. 서핑하는 사람들을 보고만 있어도 두세 시간 금방 지나갈 수 있었다. 서핑을 하던, 서핑을 보던, 그저 서핑이 좋은 것이다. 그러면서 새로운 바람, 다음 생에는 하와이에서 태어나 프로 서퍼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난, 늘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으니까.


(친구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마지막 날, 해변을 걸으며 각자 음악을 들으며 한 시간여 홀로 걸었던 그 날, 그 마지막 날, 네가 찍어 준 이 사진 기억나냐고. 그리고 말해야겠다, 우리 40대의 마지막엔 꼭 다시 서핑하러 그곳에 가자고. 딸 들이랑 같이. 우리 함께였던 그 모든 시간 속의 너와 나, 사랑한다!)


호주 마지막 날 해변. 파도에게 작별 인사 중.




40대로 넘어오며 보기 시작한 잡지. 심리학 잡지와 마인드풀니스 명상 잡지가 대부분이다. 새로 시작한 전공과 새 취미가 연결되어 있다. 오늘은 템플스테이 잡지를 꺼내들었다. 한국으로 휴가를 갔을 때 방문한 사찰음식연구소에서 운 좋게 잡지를 신청해서 받고 있다. 2019년부터 작년 2020년 것 까지 총 8 계절의 잡지를 받았다. 매 계절마다 한글판과 영문판을 보내주는 그곳에 무척이나 감사한다. 한국말이 적힌 신문 쪼가리도 귀하게 여기고 죄다 모으는데(읽지 않아도 나중을 위해 모으는 이상한 집착의 발현), 이런 멋진 잡지를 이렇게 먼 곳까지 보내주신다.


지금은 2021년. 2월. 봄이 오고 있다.

작년 네 계절의 잡지는 얼마 전에 한꺼번에 배송받았다. 작년 봄의 잡지를 올해 봄에 읽고 있다. 쑥 사진도 좋고, 진달래 사진은 너무 귀하다. 차 한 잔의 사진도 탐이 났다. 그러나 나를 잡아 끈 것은 또 산. 게다가 제주도의 산.




산을 오름에서 얻는 지혜. 느림의 지혜를 말해주고 있었다. 높고 낮은, 다름을 인지하는 지혜도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 내가 보인다. 높은 산, 굽이진 산길이 영국엔 없다며 늘 아쉬워했던 내가 생각났다. 천지 느린 언덕 숲인 이 곳에서, 나는 느림의 지혜를, 편안함의 지혜를 얻지 못하고 높고 험한 산, 내게 어려움을 주고 그것을 이겨내는 희열을 주는 산 만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찰나의 지혜가 스친다. 어려움을 극복한 뒤 단단해지는 나를 통해 느껴지는 희열에 사로잡혀 있던 것은 아닌지, 지혜가 아니라 즐거움에만 목을 매었던 것은 아닌지. 치기 어린 시절 가졌던 생각의 습관이 아직도 여기저기 숨어있는 것을 느낀다.


그대로 있는 것을 그대로 볼 줄 알아야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고 자연스럽고 자유스럽다는 것을 수련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늘 내 옆에 없는 것을 그리워하고 동경하다가 그 선을 넘는 것이 아닌가. 그리우면 그립다 말하자. 아쉬우면 아쉽다 말하자. 그러나, 늘, 그 모든 것이 없는 곳에 다른 무엇이 들어차 있음을 잊지 말자.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쁨이 아니라, 지금은 이것이고 그때는 저것이었다 말하자. 그것만이 사실이고 그것만이 진실이니까.



(잡지 한쪽, 글 하나로, 이렇게 또다시 자세를 고친다. 미션이 던져진 순간, 그리고 그것을 만난 나의 순간의 인연에 감사를 던진다. 고맙습니다, 미션 던짐이 공심 님, 그리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나, 달팽이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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