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나를 알아보게 될 때

익명의 글, 나를 말하다

by 잡생각 수집가

글을 마구 써댔다.
처음엔 그냥 일기처럼 썼다.
누가 보든 말든, 익명의 공간에서 내 생각과 기억을 흘려보내듯 썼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퍼즐처럼 조각들이 맞춰져 가는 게 보였다.


글 하나하나에 스며든 단어들, 내가 겪은 일, 내가 자주 쓰는 말투들.
쌓인 글들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혹시 눈치채지 않을까?”

직접 밝힌 적도 없고, 링크를 공유한 적도 없지만
내 글 속에는 분명 ‘나’라는 사람이 담겨 있었다.

아는 사람이라면, 조각조각 조립해서 정체를 알아차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같이 일했던 사람이 하나 있다.
그 친구는 내 말버릇도, 고민하던 주제도, 감정적인 구석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문득 상상해봤다.

그 친구가 이 브런치를 우연히 발견하고,
“어…? 이거 혹시…” 하고 느끼게 된다면?

그게 무서웠다. 동시에 묘하게 스릴 있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누군가가 나를 ‘알아내는’ 기분.

그 생각을 하고 나니, 글을 쓰는 자세가 조금 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문장 하나, 에피소드 하나를 고를 때 신중해졌다.

특히 내가 쓴 글 속엔 ‘다른 사람’도 등장한다.

누군가와의 대화, 어떤 사건, 그때 들었던 말 한마디.

그 사람을 비난하려 쓴 게 아니지만,
혹시라도 내가 그 사람을 ‘그렇게 보이게’ 만든 건 아닐까,
나도 모르게 우위에 서 있는 시선이 아니었을까


글을 되짚어보며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사실은 더 많이 쓰고 싶었던 적도 있다.
말 못 했던 억울함, 자존심이 상했던 순간,
상처받았던 일들을 다 적고 싶었다.

그걸 글로 쓰면 후련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쓰려 하면, 손이 멈췄다.
이름을 적지 않아도, 그 사람은 알아챌 수도 있으니까.
그 순간, 내 글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누군가에겐 화살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감정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있었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생각해 보니 예전에 본 웹툰 하나가 떠올랐다.

제목은 미쳐 날뛰는 생활툰.

생활툰 작가가 자신의 일상을 바탕으로 만화를 그리다가,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무너지며 삶이 무너져가는 이야기였다.


친구와의 갈등, 말하지 못한 속마음,
심지어 돌아가신 가족까지 캐릭터로 그려지며
독자들의 호응을 얻는 동시에 작가의 실제 인간관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밝고 귀여운 그림체 속에 숨겨진 건
“글은 사람을 지우고도 박수를 받을 수 있다”는, 꽤 서늘한 현실이었다.

나는 그 만화를 보고 나서부터,
누군가의 이야기나 감정을 쉽게 글로 옮기는 일이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지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



이 브런치도 처음엔 그냥 혼잣말처럼 시작했지만
이제는 어쩌면 누군가가, 진짜 누군가가
나를 찾아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어느새 나는
‘익명’이라는 방패를 들고,
‘진심’이라는 칼끝을 들이밀고 있는 셈이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내적 친밀감을 줄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쓴다.

다만, 한 문장씩 천천히, 조심스럽게.

이 칼끝이, 누군가의 마음을 찌르지 않기를 바라면서.

keyword
작가의 이전글AI는 누구부터 없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