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자존심은 그렇게 자란다
우리는 결혼하기 전에 같이 MMORPG를 했었다.
같은 서버, 같은 길드(문파), 같은 파티. 처음엔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놀이였지만, 어느새 둘 다 꽤 진지하게 게임에 빠져들었다.
아내는 게임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늘 열심히는 했지만, 조작이 서툴러 자주 죽고, 보스 패턴도 헷갈려했다. 처음 길드(문파)에 들어갔을 땐 거의 고문관 같은 존재였다.
‘아하하 언니 또 죽었어요~’
‘언니 그거 반대로 움직여야죠 ㅋㅋ’
그런 식의 농담이 자연스럽게 오갔고, 아내도 웃으며 받아들였다.
그런 캐릭터가 싫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시절 아내는 배움을 즐기던 사람, ‘초보’로서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있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우리가 그 게임을 시작한 지도 5년이 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길드장이 아내다.
그간 열심히 해온 게 쌓이고 쌓여, 공략을 먼저 정리해 공유하고, 레이드 진행도 맡고, 공략 논의도 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매일 10시간씩 던전을 파던 시기도 있었고, 그 덕분에 실력도 이제는 상위권에 속한다.
하지만 문제는… 예전 농담이 계속 이어졌다는 거다.
“언니, 오늘도 위치 헷갈리 실 예정이신가요?”
“여기가 7시 예요~! 7시방향 아시죠?”
익숙한 농담. 익숙한 웃음.
그런데 그게 이제는 예전 같지 않게 들리기 시작했다.
아내는 예전처럼 웃지 않았다. 대신 조금 씁쓸하게 웃거나, 말없이 넘어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결국 화를 냈다.
단호하게 말했다. “그만 좀 놀려.”
그 순간은 좀 싸늘했지만, 나는 옆에서 보면서 생각했다.
‘이건 충분히 그럴 만하다.’
왜냐하면… 그날 농담을 한 길드원이 아내보다 플레이가 훨씬 못했거든.
심지어 아내가 그 사람 죽은 자리까지 커버하며 전투를 마무리했는데,
끝나고 돌아온 건 '언니 또 사고쳤네'식의 조크였다.
놀라운 건, 아내가 원래 그렇게 놀리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그동안은 늘 허허 웃으며 넘겼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내 안에 '게임 부심'이라는 게 자랐던 거다.
열심히 해서 올라온 실력, 책임지고 이끈 경험, 그 과정에서 생긴 자존감.
그런 자부심에 흠집이 생겼을 때, 처음엔 웃어넘겼지만…
결국 그 조용한 자존심이 상처를 받았던 거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내 자신을 떠올렸다.
나 역시 한 분야에서 15년 넘게 일하며
누군가의 사소한 딴지나 비판에 과하게 예민하게 굴었던 적이 있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조차 무시한 채,
‘나 정도면 잘하고 있지 않나?’는 고정된 이미지에 매달렸던 순간들.
이게 꼰대가 되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처음엔 배우고 싶어서 마음을 열고, 뭐든 수용하려 했던 사람이
어느새 자기 영역에서 완고해지고, 고집이 생기고,
비판보다 인정에 더 익숙해진다.
그게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성장은 당연히 자부심을 낳고, 자부심은 곧 자존심이 되니까.
그 자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가끔은 그 단단해진 마음을 다시 조금만 열어보는 것도 좋겠다.
내가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던전에서 실수해도 웃고 넘기던,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그 시절의 유연함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