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은 사람은 죄가 없을까?

디셉션 쇼츠 한 편이 가져온 법적 사유의 확장

by 잡생각 수집가

며칠 전 유튜브 쇼츠에서 짧은 드라마 클립을 하나 봤다.

한 남자가 리얼리티 쇼에 참가하게 된다.

제시된 미션은 단순했다.

“물총으로 지정된 사람을 맞히면 상금을 드립니다.”

그는 아무 의심 없이 물총을 쐈고,

상대는 쓰러졌다.

독극물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FBI에게 체포되면서 영상은 끝났다.

결말이 없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멈추지 않았다.


과연 우리나라였다면, 이 사람은 유죄였을까?


그는 속았고, 사람은 죽었다.

법적으로는 어떻게 될까?

우리 형법에선 어떻게 판단할까?

찾아보니, 의외로 명확했다.

우리 형법은 '고의성'뿐 아니라

그 상황이 '사회 통념상 일반적인가', '의심할 수 있었는가'를 중심으로 판단한다.


결국 핵심은 “누구라도 속을 수 있는 구조였는가?”였다.

디셉션의 그 장면은 그 기준에 부합했다.

실제 쇼처럼 꾸며졌고, 진행자와 미션, 상금이 모두 '진짜'처럼 보였다.

→ 고의 없음 + 예견 불가 + 속을 만한 구조

무죄 가능성 매우 높음



그런데 보이스피싱은 왜 유죄가 나올까?


그러다 문득 보이스피싱 계좌 사례가 떠올랐다.

“계좌만 빌려줬다”던 사람들.

그들도 대부분 속았다고 주장한다.

“대출을 받으려면 본인 명의 통장 외에 추가로 한두 개 더 만들어서 보내달라더군요.”

“카드 실물을 택배로 보내야 심사 승인이 된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들은 처벌된다.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사기방조 등으로 벌금이나 집행유예, 심하면 실형까지.


속은 건 같은데, 왜 결과는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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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 상황을 비교해봤다.


디셉션 속 참가자는 ‘TV쇼라는 믿음’ 속에서 자연스럽게 물총을 쐈다.

그 상황은 누가 봐도 속을 수 있는 정황이 명확했다.

즉, 법적으로 말하면 ‘예견 가능성이 낮고, 고의가 없으며, 사회 통념상 충분히 혼동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반면 보이스피싱의 경우,

‘대출 절차라며 통장과 체크카드를 택배로 보내달라’는 요구는

정상적인 금융관행과는 거리가 있는 구조다.


법원은 이를 “상식적으로 의심할 수 있었던 상황”으로 해석한다.

디셉션 사례는 결과적으로 누군가가 목숨을 잃는 심각한 일이 벌어졌지만,

그 참가자에게 그런 결과를 예견할 수 있는 단서는 없었다.

반면, 보이스피싱은 금전적 피해가 발생한 사안이지만

그 과정에서 의심할 만한 비정상적인 요구가 반복되었고,

그걸 지나치게 순순히 받아들였다는 점이 법적으로 문제로 본다.


결론적으로 법은 이렇게 묻는다.

“그 사람은 진짜 속을 수밖에 없었는가?”

“그 상황은 일반적인 사회 기준에서 납득 가능한가?”




실제 판례를 찾아봤다.

실제로 통장 실물을 대여했음에도 무죄가 난 사례가 있다.

피고인은 대출을 위해 정당한 절차로 믿고 자신의 통장과 체크카드를 제3자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금전적 이득도 받지 않았고, 통장은 다시 돌려받기로 되어 있었다.

법원은 피고인이 범죄에 연루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고,

상식적으로 속을 수밖에 없는 정황이었다는 점을 인정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겉으로 보면 이 사례도 보이스피싱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통장 실물을 넘겼고, 결과적으로 범죄에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원은 피고인이 진심으로 정상적인 대출 절차라고 믿었으며,

이득을 취하지 않았고, 통장 반환을 전제로 한 일시적 제공이었다는 점을 들어

예외적으로 무죄를 인정한 것이다.

(출처: 대법원 판례 2014다98222 외)
https://www.law.go.kr/precInfoP.do?precSeq=208509

이걸 보고 알게 됐다.

법은 정말로, 속을 수밖에 없었던 정황을 분명히 고려한다.



나는 법을 오해하고 있었다

이전까지 나는 법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속았다고 해도 죄가 되다니.”

하지만 디셉션 한 편과 판례 하나가 내 시선을 바꿨다.

법은 단순히

“속았냐 안 속았냐”를 묻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서

“정말 누구라도 속을 수 있었는가?”를 본다.


그리고 나는 생각이 바뀌었다

보이스피싱도 억울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법은

“정말 속을 만했는가?”를 기준으로

그 경계를 그리려 애쓴다.

그리고 때로는,

그 기준이 나보다 훨씬 더 섬세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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