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문을 열고 한참을 생각했다. 뭘 꺼내려고 했지? 두서없이 냉장고 위칸부터 아래칸을 모두 훑고 난 후에 알게 되었다. 꺼내려고 연 것이 아니라 집어넣으려고 연 것이라는 것을. 웃어 넘기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간담이 서늘했다. 전달받은 업무를 모두 까먹고 퇴근했을 때 걸려온 전화는 보이스피싱 보다 찜찜했다. 무엇 하나 집중하지 못하고, 자주 잊어버리는 바람에 실수가 많았다.
그 무렵 내 인간관계에는 엄청난 균열이 생기고 있었는데 내가 속한 부서에 부서원들이 서로를 험담하느라 나는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그 험담을 양쪽에서 듣는 것도 지쳐 직접 해결점을 찾아보겠다고 사과의 자리도 만들어보고, 날이 선 비난을 하는 동료를 붙잡고 달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다. 사모임이라면 모임을 그만두면 그만이겠지만, 조직 내에서 벌어진 일에 눈을 딱 감고 일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실 일만해도 됐을 것 같다. 죽일 놈의 정.)
양쪽의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니 스트레스 게이지는 가득 찼지만 정작 내 스트레스를 말할 곳은 없었다. 집에 오면 약간의 심호흡을 할 시간은 있었지만 다시 출근을 하면 그 불편하고 불안정한 공간에서 업무를 한다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그때부터 일은 일대로 기억나지 않고, 일상은 일상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스트레스가 만성화가 되면 정보를 암기하는 뇌의 기능을 크게 방해한다고 한다. 짧은 순간 받은 스트레스는 짧은 기억을 잊히게 하지만 스트레스가 장기화되면 뇌에 보다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기억력이 나빠지면 일의 실수가 잦고, 일의 실수가 잦으면 또 다른 스트레스가 밀려오는 악순환이 졌다. 이런 악순환이 벌어지다 보니 당장 어제 저녁에는 뭘 먹었는지조차 기억하려면 엄청난 시간을 쏟아야 했다.
그때부터 일기를 세세하게 쓰기 시작했다. 세세한 것 하나하나 기록하여 남기면 기억력에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반에는 일기에 몇 시에 일어났고, 뭘 먹었고, 어디를 다녀왔는지 정도를 썼다. 무슨 책을 읽었는지, 영화는 어땠는지 정도의 짧은 감상도 남겼다.
그러면서 점점 삶의 포커스가 나에게 맞춰지는 것을 체감했다. 타인이 험담하는 이야기들은 내 삶의 이야기가 아니니 귀에 와 닿지 않았고, 일기에 구구절절 쓸 필요도 없었다. 나의 일기장이니 온전히 나의 이야기로 채우고 있었고, 채우고 싶었다. 그렇게 쓰다 보니 인간관계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집착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주변에 있는 수많은 인간들이 아니라 인간들 속에 ‘나’다.
채워진 일기가 꽤 쌓였을 때 일기를 다시 읽어보았다. 내가 당시에 썼던 감정을 천천히 다시 읽어보니 지금 느끼는 감정과 전혀 다르기도 했다. 격분에 못 이겨 쓴 이야기들도 지나고 보니 별일이 아니고, 때로는 잘 풀려 있기도 했다. 슬픔에 잠겨 울면서 쓴 일기는 다시 읽어도 슬펐지만, 이상하게 현재에 내가 그 당시에 울고 있는 나에게 안쓰럽다는 감정을 느꼈다. 마치 그 당시에 울고 있는 나는 전혀 내가 아닌 것처럼. 그리고 뭔가 한 뼘 성장했다는 느낌도 들었다.
일기를 다시 읽으면서 재밌었던 점은 일기 대부분이 ‘하고 싶다.’로 끝이 난다는 것이었다. ‘영화 보러 가고 싶다.’, ‘먹고 싶다.’, ‘여행가고 싶다.’, ‘배우고 싶다.’, ‘쉬고 싶다.’ 하고 싶은 일만 빼곡한 게 아니라 ‘꾸준히 하고 싶다.’, ‘친절하고 싶다.’, ‘자주 웃고 싶다.’같은 감정이나 태도에 관한 것들도 많았다. 그런데 그 뒤에 일기를 추적해서 보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도배한 심정과는 달리 전혀 행동으로 옮기고 있지 않았다.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해야 하는 일만 했고 그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불쾌한 감정에만 매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기를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읽는 것도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꼭 읽고 난 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캘린더에 하고 싶은 몇 가지를 적어 놓고, 하고 싶다고 한 행동들을 집중해서 하기 시작했다. 영화도 보러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 식사도 했다. 자주 웃고 싶다고 쓰고 의식하며 행동하니 웃을 일이 많아졌다. 때때로 스트레스와 우울감이 일기를 점령해 가고 있으면 뭘 하고 싶은지를 찾고 하고 싶은 것들을 했다.
일기는 현재 나의 욕구와 감정과 상태를 훤히 알려주는 쇼핑몰 장바구니 같은 것이다. 장바구니에 담는 것만으로는 내 것이 되지 못한다. 삶의 포커스가 어긋나서 하루하루가 고통이라면 일기를 쓰고, 읽고, 행동하는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