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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월 Feb 23. 2023

약속한 날은 다 길일(吉日)

수행이 필요해


주말마다 일산 호수공원은 달림이들의 숨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걷고 있다보면 그들의 거친 숨소리와 쿵쿵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실시간으로 들립니다. 발을 맞춰 질서정연하게 달리는 모습은 보기 좋습니다. 달리기를 하기에 요즘처럼 좋은 날씨도 없을 겁니다.  


공원에서 달리는 사람들을 보노라니 문득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그는 마라톤 매니아입니다. 자격조건이 까다롭다는 미국의 보스톤마라톤대회 원정까지 다녀올 정도였으니 그의 마라톤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작지만 단단하고 강인한 그의 모습은 마라톤을 한 덕분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런 그와 지나가는 말로 약속을 한 적이 있습니다. 호수공원을 같이 달려보자고. 내가 먼저 제안했는지, 그가 먼저 말을 꺼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약속만큼은 단단히 한 건 확실합니다. 달리는 일이라면 나도 자신이 있었을 때입니다. 5킬로미터가 조금 안 되는 호수공원을 두 바퀴 정도 거뜬히 달렸으니까요. 그 역시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약속은 이런저런 일로 자꾸 미뤄졌습니다. 우선 그를 만나기가 어려웠습니다. 직장이 지방이어서 일산 집으로 오는 날이 들쑥날쑥이었고, 만학도였던 그는 논문 준비를 하느라 좀체 시간을 내지 못했지요. 일하랴 공부하랴 바쁘게 살았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시간이 조금 흘렀고, 그의 소식을 뜻하지 않게 듣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은 충격이었습니다. 아뿔싸, 폐암 4기라기. 나보다 몇 배 건강해 보인 그였기에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참, 사람 일은 알 수 없다는 말을 이럴 때 쓴다는 걸 새삼 알았습니다. 폐암 4기는 치료약도 나와 있어 예후가 좋다는 말을 들었지만 속상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지요.


그 후 몇 차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쾌유를 빌었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레 이런 중병에 걸리면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할 일이 별로 없는데 가끔 만나는 사이라면 더 더욱 도울 일이 없습니다. 그게 아쉬웠지요. 그렇게 우리의 약속은 뒷전으로 밀렸습니다.  


그로부터 또 몇 달이 흘렀습니다. 지인으로부터 그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번엔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치료도 잘 받고 있고, 상태도 호전 중이라는 말을 들었던 터라 이대로 가면 낫겠지 하는 마음을 가졌더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투병 중에 상태가 악화되어 의식을 잃었고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는 겁니다. 삶이란 게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지인과 함께 일산병원 장례식장을 찾았습니다. 코로나19 여파로 식장은 문상객이 많지 않았습니다. 가족조차 그가 그렇게 빨리 갈 줄은 예상치 못한 얼굴이었습니다. 남겨진 가족들을 보니 더 애잔했습니다. 헛헛한 마음을 가눌 길 없었지요.  


그가 떠나는 바람에 그와의 약속은 완전 공수표가 되었습니다. 호수공원을 돌았다면 그와의 추억 하나쯤은 가졌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작은 약속 하나 지키지 못한 내가 조금 싫어졌습니다. 이 상황에서 약속을 떠올리다니 조금은 뜬금없어 보이겠지만, 생각은 자꾸 그리로 향했습니다.

  

우리는 늘 누군가와 크고 작은 약속을 합니다. 약속은 관계를 이어가고 돈독하게 만드는 촉진제입니다. 그런데 바쁘다는 핑계로 약속을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여 약속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고도 합니다. 이 말이 괜히 나오진 않았겠지요. 하지만 약속한 당자가 저 세상으로 떠나버려 영영 지킬 수 없다면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공허한 약속을 줄이려면 아예 약속을 잡지 않는 것이 상책일 겁니다. 약속을 하지 않았으니 어길 일도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왠지 허전합니다. 약속 없는 삶이란 얼마나 건조한가요.


아마도 차선책이 있다면 한 번 정한 약속은 꼭 지키는 걸 겁니다. 미룰만한 이유를 만들지 않고, 지키려고 노력한다면 말이지요. 불가피하게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도 있겠지만, 가능한 약속한 날을 길일이라고 믿을 때, 우리 삶에서 후회는 종적을 감추게 될 겁니다. 길일은 삶에서 의미 있고 좋은 날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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