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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친 자리, 마음이 머물다

나를 단단하게 하는 시간

by 심월


풀밭에는 철쭉, 장미, 목련만 있는 게 아니야.

씀바귀, 민들레도 피고

애기똥풀도 노란 얼굴을 쏙 내밀고 …

우리 동네에는

사람 사는 집만 있는 게 아니야.

까치 집, 개미 집, 다람쥐 집.

모두 모여서 함께 사는 거야.

— 김위향, 〈모두 함께〉


김위향 시인의 동시는 맑고 따뜻합니다. 풀밭에 피어나는 꽃들, 벌과 나비뿐 아니라 하루살이와 개미까지 함께 어울려 사는 모습을 담담히 그려냅니다. 시의 말처럼 우리 동네에는 우리 집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여러 사람과 여러 직업, 그리고 수많은 생명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아갑니다.

특히 이 구절에 마음이 오래 머뭅니다. “사람 사는 집만 있는 게 아니야”, “모두 모여서 함께 사는 거야.”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종종 잊고 삽니다. 우리 곁에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새와 고양이, 개미와 다람쥐,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생명들까지 어울려 한 자리를 지킵니다. 지구를 개체 수로 따지면 사실 인간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지구는 인간의 땅이라기보다, 식물과 동물들의 터전이라 해야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인간 중심의 관점에 사로잡혀 지구를 개발하고 훼손해 왔습니다. 코로나19의 팬데믹 또한 인간이 생태계를 파괴한 결과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모두 모여 함께 산다”는 말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지혜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메시지를 그림책 《영이의 비닐우산》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윤동재의 시에 김재홍 그림작가가 그림을 더한 이 작품은, 서로 연결된 삶의 의미를 잔잔하면서도 깊게 전합니다.

비 오는 날, 영이는 초록 우산을 들고 학교에 갑니다. 학교 앞에서 그는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앉아 있는 한 노인을 봅니다. 덥수룩한 수염, 추레한 옷차림의 노인. 아이들은 그를 놀리고, 문방구 아주머니는 욕설을 퍼붓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그저 고개만 숙이고 앉아 있을 뿐입니다.

영이는 수업 시간 내내 마음이 무겁습니다. 결국 자리를 박차고 나와, 억수 같은 빗속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우산을 씌워 줍니다. 그리고는 홀로 빗속을 뛰어 학교로 돌아갑니다.

수업이 끝나고 나왔을 때, 비는 이미 그쳤습니다. 노인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영이가 씌워주었던 우산이 가지런히 접힌 채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습니다. 영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립니다.

“할아버지가 가져가셔도 괜찮은 건데……”

비가 그쳤는데도 영이는 우산을 쓰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 장면에서 아이의 마음이 조용히 흔들립니다. 우산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 건너간 흔적처럼 보입니다.

그림책 속 장면은 많은 질문을 남깁니다. 왜 노인은 우산을 가져가지 않았을까? 왜 영이는 굳이 우산을 쓰고 돌아갔을까?

노인은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려 했을지 모릅니다. 자신에게 베풀어진 호의를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었던 것일까요. 우산을 제자리에 가지런히 세워둔 모습에서 노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영이도 그 마음을 읽었을까요. 그래서 비가 그쳤음에도 우산을 펼쳐 쓴 것일까요. 두 마음은 말없이 오가며, 서로의 마음결을 닮아갑니다. 그림작가 김재홍은 원작 시에는 없는 이 장면을 더했습니다. 아이와 노인의 마음이 깊은 곳에서 이어졌음을 보여주려는 듯합니다.

《영이의 비닐우산》을 읽다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노인을 향한 아이의 순수한 시선, 그리고 그것을 품위 있게 되돌려준 노인의 태도. 두 존재는 서로에게 거울이 되어, 우리 안에 있는 이타성과 인간적 품위를 다시 일깨워 줍니다.

결국 이 책은 “우리 동네에는 우리 집만 있는 게 아니다”라는 동시의 구절과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크고 작은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 그것이야말로 함께 살아가는 삶의 출발점일지 모릅니다.

일상에서도 비슷한 순간들을 경험합니다. 지하철 계단을 오르다 무거운 짐을 든 노인을 도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고맙네”라는 한마디로 마음을 건네주셨습니다. 손을 내민 건 잠깐이었지만, 그날 하루 제 마음은 오래 따뜻했습니다. 짧은 순간에도 마음은 마음을 알아보고, 세상은 그렇게 조금씩 이어집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을 나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서로의 무게를 조금씩 나누어지는 일, 서로의 눈빛을 읽고 마음을 건네는 일입니다. 김위향 시인의 동시와 그림책 《영이의 비닐우산》은 그 사실을 다정하게 일깨워 줍니다.

혹시 당신 곁에도 외롭게 서 있는 누군가가 있지 않나요. 그렇다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우산을 씌워주는 마음으로 다가가 보세요. 우리가 서로의 안부를 기억할 때, 세상은 비로소 함께 사는 얼굴을 되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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