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단단하게 하는 시간
잎새 다 떨구고 앙상해진
저 나무를 보고
누가 헛살았다 말하는가
열매 다 빼앗기고
냉랭한 바람 앞에 서 있는
나무를 보고
누가 잘못 살았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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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겨울나무>
도종환 시인은 앙상하게 남은 나무를 향해 ‘헛살았다’ 거나 ‘끝났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뭇잎을 다 내어주고, 열매도 다 바친 나무의 헐벗은 모습을 보며 쉽게 단정하는 시선을 경계하지요. 그 나무는 청춘의 날들을 바쳐 숲을 이루고 산을 지켜낸 존재였습니다. 그 눈물겹도록 치열한 시간을 빼놓고 헐벗은 지금만 본다면, 나무의 온전한 삶을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이 시는 우리에게 존재의 표면만 보고 함부로 재단하는 일이 얼마나 무심하고 위험한지를 일깨워 줍니다. 겨울나무의 헐벗음은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살아온 세월의 증거입니다. 그 나무의 뒤에는 계절마다 푸르름을 나누고 열매를 길러낸 지난 시간이 고요히 숨 쉬고 있습니다. 시인은 바로 그 이면을 보라고, 드러난 것 너머의 시간을 헤아리라고 당부합니다.
우리는 대개 눈앞에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착시현상처럼 배경이 바뀌면 같은 길이도 달라 보이고, 고릴라 실험에서처럼 공 던지기에 몰입하다 보면 곁을 스치는 고릴라도 보지 못합니다. 보이는 그대로가 전부라고 믿지만, 우리의 시선은 언제든 쉽게 속고 왜곡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현재 모습만으로 그가 살아온 길을 단정한다는 것은 본질을 놓치는 일이기도 합니다.
김선남 작가의 그림책 《다 같은 나무가 아니야》는 이러한 ‘겉만 보고 판단하기’의 오류를 부드럽게 드러냅니다. 처음엔 다 비슷해 보이는 나무들이 사실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싹이 돋아나는 모양이 다르고, 꽃의 색깔과 향기가 다르고, 열매의 빛깔과 모양도 제각각입니다. 자세히 보면 나무들은 모두 고유합니다.
“나무를 알아간다는 것은 세상을 알아가는 것과 같아요. 왜냐하면 나무는 우리보다 훨씬 오래전에 생겨나 그 무수한 세월 속에서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다른 생물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작가는 ‘작가노트’에서 나무를 알아간다는 것은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라면서, 나무를 세심히 바라보는 일은 곧 세계를 깊이 이해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시와 그림책은 같은 목소리로, 드러난 현재의 모습에만 머무르지 말고, 보이지 않는 이면을 보라고 합니다. 다정하고 주의 깊은 시선이 있을 때, 우리는 존재의 고유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저 역시 일상에서 이 사실을 깨우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동네 산책길에서 마주친 벚나무를 매화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새싹이 나기 전 앙상한 가지 모습이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른 봄날, 화사한 꽃을 보고 은은한 향을 맡고서 그제야 매화나무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이후에는 그 나무 곁을 지날 때마다 전혀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쉽게 놓쳐버리는 본모습을, 계절의 변화를 통해서야 알아차린 것이지요.
비슷한 경험은 사람 사이에서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늘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동료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불친절하거나 차갑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함께 프로젝트를 하면서 알게 된 건, 그는 말 대신 묵묵히 행동으로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겉모습의 태도만 보고 쉽게 단정했던 제 시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의 침묵에는 배려와 성실이 숨어 있었음을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겨울나무의 앙상함도, 서로 닮아 보이는 나무들의 모습도, 처음에는 빈약해 보이고 단조롭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시간과 사연, 고유함과 다양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러난 표정이나 상황만으로는 결코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끝났다, 끝났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실패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우리는 종종 ‘끝났다’ 거나 ‘쓸모없다’는 단정 속에서 누군가를 쉽게 밀어내곤 합니다. 하지만 겨울나무를 바라본 시인의 애정 어린 눈처럼, 그리고 그림책 속 작가의 다정한 목소리처럼, 주의 깊은 눈으로 본다면 세상은 늘 새롭게 다가옵니다. 오래 바라볼 때만 보이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들꽃이, 나무가 그렇듯, 사람도 그렇습니다.
겉모습에 갇히지 않고 존재의 내면을 보는 눈, 그것이 우리를 더 따뜻하게 만들고 세상을 더 풍요롭게 합니다. 겨울나무는 끝난 것이 아니고, 나무들은 다 같은 나무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는 다 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다정하고 주의 깊게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이해하고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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