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단단하게 하는 시간
공광규 시인의 시 〈담장을 허물다〉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담장을 허무는 순간, 시인은 뜻밖의 체험을 합니다. 텃밭 수백 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백 살 된 느티나무와 그늘, 까치집과 새소리까지 고스란히 집 안으로 스며듭니다. 담장이 사라지자 노루와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지르고, 풍년초가 덮인 언덕과 연못의 구름, 해와 별들까지 시인의 세계로 들어옵니다. 작은 시골 흙집에 살던 시인은 순식간에 “큰 마을의 영주”가 되었다고 고백하지요.
공시가격 구백만 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의 영주가 되었다
담 하나 허물었을 뿐인데,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가 열리고 경계가 사라졌습니다. 무엇을 더 가진 것도 아닌데, 모든 것을 품은 듯한 기분. 이것이 시인이 전하려는 ‘무경계’의 세계일 겁니다.
이 시는 그림책으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시인의 언어가 이미 이미지로 가득했지만, 김슬기 작가의 그림은 그 세계를 더욱 확장하고 깊게 보여줍니다. 담장을 허무는 장면은 단순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그 뒤로 펼쳐지는 풍경은 압도적입니다. 노루가 뛰어들고 멧돼지가 지나가고, 토끼가 흔적을 남기며 논과 산, 심지어 별빛까지 안으로 들어오는 경험. 독자는 담 하나 허물었을 뿐인데 삶이 얼마나 풍성해질 수 있는지 생생하게 체감하게 됩니다. 그림책은 시인이 보여준 역설을 더 선명하게 전달합니다. 경계를 세우면 안전해질 것 같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가두는 일일 수 있다는 것. 반대로 담을 허물면 불편이 찾아올 것 같지만, 오히려 더 큰 연결과 풍요가 다가온다는 것 말이지요.
사실 우리에게 담장은 낯설지 않습니다. 집과 집, 땅과 땅을 가르는 담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무 익숙한 풍경입니다. 더 높고 더 두텁고 더 단단하게 세우는 것이 마치 안전과 소유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하지요.
어릴 적 풍경을 떠올리면, 담은 경계이면서도 동시에 소통의 창이었습니다. 담 너머로 이웃과 인사를 건네고, 제사 음식을 나누던 기억. 낮은 담 덕분에 누구네 집의 저녁 냄새가 스며들고, 기침 소리도 금세 들려오곤 했습니다. 담은 있었지만 담이 문제가 되지 않던 시절이지요.
시인이 말하는 담장은 흙이나 벽돌로 쌓은 물리적 경계만을 뜻하진 않을 것입니다. 마음의 담, 심리적 장벽도 포함됩니다. 내 생각만 옳다 고집하는 마음, 자존심을 먼저 세우는 태도, 내 것만 소중하다고 여기는 집착. 이런 담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삶을 답답하게 만들고 세상을 좁게 만듭니다.
누군가와 말다툼을 한 뒤 며칠 동안 눈길조차 피하며 지내는 일, 회사에서 다른 팀과 불편해져 점심시간을 일부러 어긋나게 쓰는 일. 보이지 않는 담은 그렇게 세워지고 점점 두터워집니다. 경계 안에 머무르면 안전한 듯 보이지만, 동시에 외로움과 고립의 자리로 떨어지기도 하지요.
반대로 경계를 허물면 두려움이 함께 들어오지만, 풍요와 기쁨 또한 들어옵니다. 이사 온 첫날, 옆집에 간단한 선물을 들고 “잘 지내봅시다”라고 건네는 한마디에 경계는 금세 낮아집니다. 놀이터에서 처음 만난 아이들이 서먹함을 잠시 지나 공 하나로 금세 어울려 노는 장면도 그렇습니다. 울타리도, 계산도 없는 세계에서 아이들은 이미 담장을 넘어섭니다.
숲길을 걷다 보면 나무와 나무 사이로 난 좁은 오솔길을 만나곤 합니다. 누가 만든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오가고 바람이 스쳐가며 자연스레 생긴 길. 누군가의 경계를 침범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서로의 발걸음이 이어져 만들어진 길. 그것이야말로 담장을 허문 자리에서만 생겨나는 풍경일 것입니다. 공광규 시인이 담장을 허물고 느꼈다는 “눈이 시원해졌다”는 감각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갈망하는 해방의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시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담을 낮추면 세상은 더 풍성해진다는 것. 경계를 허물면 예상하지 못한 풍경과 존재들이 삶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 담장이 무너질 때, 오히려 우리는 더 크게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마을을 정원으로 갖게 되었다
시인의 고백은 물리적인 집과 담을 허물고, 마음의 담을 낮출 때 우리는 이미 충분히 넓은 정원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큰 마을의 정원은 함께 사는 삶의 은유이고, 자연과 우주를 품으려는 시인의 상상력이자 기쁨입니다.
혹시 당신 안에도 아직 허물지 못한 담장이 있지 않나요? 그것이 두려움이든, 고집이든, 오래된 오해이든, 그 담을 조금만 낮춰도 생각보다 큰 세계가 안으로 들어올지 모릅니다. 넓은 정원을 가진 마음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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