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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도 거리가 필요합니다

나를 단단하게 하는 시간

by 심월


아무리 가까운 두 사람이라도 무한의 거리가 존재함을 받아들이라.

그러면 둘이 함께 하는 멋진 삶이 시작되리니.

둘 사이에 놓인 거리를 사랑하라.

그 거리가 있어 하늘을 배경으로 서로의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있는 것.

― 라이너 마리아 릴케, 〈편지〉


릴케의 시 〈편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시인은 그 거리를 꺼려야 할 틈이나 불편한 장벽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삶을 아름답게 하는 조건으로 바라보았지요. 가까울수록 그 간격을 인정하고, 나아가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사람 사이에는 누구나 보이지 않는 간격이 있습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다 상처 입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의 뜻을 단번에 이해할지도 모릅니다. 사랑과 우정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그 간격을 잊고, 결국 상처를 주고받으며 돌아서기도 합니다. 관계를 포기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본 사람이라면 “거리를 인정하라”는 시인의 말이 더욱 깊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단순히 거리를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거리를 ‘사랑하라’고 말하지요. 그 거리를 존중하고 아낄 때 얻게 되는 선물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서로의 얼굴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고,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다고요. 타협이나 회피가 아니라, 관계를 지켜내는 지혜가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옛사람들도 비슷한 말을 남겼습니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은 너무 가까이도, 너무 멀리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친구나 가족처럼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지혜가 담겨 있지요. “구이경지(久而敬之)”라는 말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랜 사이라도 늘 존중하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막역한 사이라도 예의를 잃으면 오래가기 어렵지요. 사랑이 깊을수록 존중은 더 필요합니다.


그림책 《적당한 거리》의 전소영 작가도 이 진실을 깨달은 듯합니다. 그는 식물을 키우며 여러 번 실수를 합니다. 관심이 부족해 말라버리기도 하고, 지나친 보살핌으로 뿌리가 썩기도 하지요. 책의 헌사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나의 무지와 무심함으로 말라간 식물들에게.” 그는 거리를 이해하지 못해 저질렀던 수많은 실수를 돌아봅니다.


“한 발자국 물러서 보면 돌봐야 할 때와 내버려 두어야 할 때를 조금은 알게 될 거야.”


작가의 이 고백처럼 식물에게도 거리가 필요합니다. 무심하면 시들고, 지나치면 숨 쉴 틈을 잃습니다.

인간관계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때로는 다가서야 하고, 때로는 물러서야 합니다. 적당한 거리는 무심도 집착도 아닌,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렇다고 ‘적당하다’는 말이 방관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식물을 돌볼 때 길게 뻗은 가지를 잘라내고, 새 흙을 갈아주는 일은 여전히 필요하지요. 다만 그것이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관계 역시 상대가 숨 쉴 만큼 다가서고, 필요한 만큼만 물러서는 일. 그것이 건강한 거리를 만드는 비결일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모든 것을 함께하는 것’이라 믿곤 합니다. 가족이니까, 친구니까, 연인이니까 무엇이든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거리를 모른 채 다가서면 오히려 관계는 쉽게 상합니다. 가까울수록 다치기 쉬운 법입니다. 오래 함께하고 싶다면, 오히려 일정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그 거리가 있어야 서로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릴케의 시를 전소영 작가가 알고 그림책을 만들었다면, 헌사글은 아마 조금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실수와 실패는 여전히 반복되겠지만, 그 과정을 통해 배움과 성숙이 이루어질 테니까요. 거리를 알아차리고 사랑한다는 것, 릴케가 말한 ‘멋진 삶’은 어쩌면 그 거리 위에서만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림책 속 한 문장, 시 한 줄이 알려주듯, 삶은 가까움과 멂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예술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피해야 할 틈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길 위에서 예술처럼 다루어야 할 소중한 자리입니다. 우리가 그 거리를 존중하고 사랑할 때, 관계는 오래 지속되고 삶은 더 아름다워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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