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단단하게 하는 시간
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십 분 간 쉴 때, 흘러간 뽕짝 들으며 가판대 도색 잡지나 뒤적이다가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종이컵 커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쁜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 화끈거리는 손등 손바닥으로 쓸며, 바닥에 남은 커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이성복 시인의 시 〈그렇게 소중했던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시인은 버스가 떠나는데도 종이컵 커피를 내려놓지 못한 채 붙잡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묻습니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했던가.
우리도 종종 이럴 때가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큰 의미는 없는데, 그 순간에는 마치 놓치면 안 될 것처럼 매달렸던 일들 말이지요. 시를 읽을 때마다 저 자신에게 묻곤 합니다. 최근에 무엇을 그렇게 붙잡으려 했는가. 그것이 정말 내 삶에서 지켜야 할 가치였던가. 우리는 자주 사소한 것에 마음을 빼앗겨 정작 본질을 놓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시인은 시의 마지막 구절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는 삶이 꿈이다
그림책 《오리건의 여행》의 두 주인공, 곰 오리건과 광대 듀크는 서커스단에서 만나 깊은 우정을 쌓습니다. 어느 날, 오리건이 듀크에게 자신을 숲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합니다. 곰이 있어야 할 곳은 서커스 무대가 아니라 가문비나무 숲이라 생각한 듀크는 마침내 결심합니다. 과거 자신을 옭아맸던 무거운 열쇠 꾸러미를 내려놓고서.
오리건은 늘 야생의 숲을 그리워했습니다. 듀크 역시 오리건의 부탁을 들어주기 전부터,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칠했던 빨간 코를 벗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회색빛 도시의 소음과 서커스의 환호는 겉보기에 화려했지만, 두 존재의 마음속에는 공허와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었을 겁니다.
이윽고 오리건은 야생의 숲을 찾아, 듀크는 혹시 만나게 될지 모르는 ‘백설공주’를 찾아 길을 떠납니다. 붙잡을 필요 없는 환호를 내려놓고, 진정 붙들어야 할 숲과 자유를 위해서 머나먼 여행을 시작합니다. 서부 개척의 길을 따라, 고흐의 밀밭 같은 황혼을 지나서. 그 여정에서 많은 이들의 애환과 꿈을 듣고, 마침내 눈 덮인 숲에 도착합니다.
오리건과 듀크가 길을 떠나도록 재촉한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깊이 잠들어있던 ‘핵심가치’입니다. 핵심가치란 순간의 충동이나 외부 조건이 아니라, 나를 근본에서 움직이는 힘입니다. 정직, 신뢰, 사랑, 자유, 가족, 성실, 배려 등등….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언제나 삶의 중심을 이루는 기준입니다. 오리건에게는 숲이, 듀크에게는 분칠한 코를 벗고 자기 얼굴로 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림책의 마지막 장면. 흰 눈이 쌓인 숲 속에 빨간 코를 남겨둔 채 걸어가는 듀크의 뒷모습이 그려집니다. 참으로 인상적인 장면이지요. 그는 무대의 웃음을 버렸지만, 자신다운 삶을 선택합니다.
삶은 끝없는 선택의 길이라고 합니다. 매 순간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묻고 또 답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버스를 붙잡을 것인가, 커피를 내려놓을 것인가. 서커스의 환호를 따를 것인가, 숲의 고요를 택할 것인가. 그 선택의 중심에는 언제나 나를 지탱하는 이유 하나가 있습니다.
당신의 커다란 야생숲, 당신의 백설공주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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