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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마법이 필요하다면

나를 단단하게 하는 시간

by 심월


삶이 노래처럼 흘러갈 때

즐거워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가치 있는 사람은 모든 일이 잘못 흘러갈 때

미소 지을 수 있는 사람이다.

― 엘라 휠러 윌콕스, 〈가치 있는 사람〉 중에서


시인은 삶의 무게를 조용히 짚어줍니다. 일이 잘 풀릴 때 웃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고난이 닥쳐올 때, 여전히 마음을 지켜내며 작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시인은 무너짐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다시 걸어 나갈 힘을 품은 사람을 ‘가치 있는 사람’이라 부릅니다.


시인에게 웃음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의지입니다. 삶이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더라도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결심, 흔들리는 자리에서도 빛을 잃지 않으려는 용기의 얼굴이지요. 우리는 언제 웃을 수 있을까요. 기쁨이 충만한 순간뿐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미소 지을 수 있을까요. 시는 우리에게 그렇게 묻고 있는 듯합니다.


그림책 《두려워하지 마, 나무야》의 작은나무는 이 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봄과 여름 동안 푸른 잎을 자랑하던 작은나무는 숲 속 친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습니다. 그러나 가을이 오자, 다른 나무들이 서늘한 바람을 받아들이며 잎을 떨구는 사이, 작은나무는 끝내 놓지 못합니다. 잎을 잃는 것이 곧 자신을 잃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지요.


동물 친구들의 다독임에도 작은나무는 망설입니다. 그 사이 다른 나무들은 쑥쑥 자라나 어느새 훌쩍 커버립니다. 몇 번의 계절이 흐른 뒤, 작은나무는 깨닫습니다. 스스로 붙들고 있는 잎을 내려놓지 않으면 혹독한 겨울을 건널 수 없다는 사실을.


첫 잎이 떨어지던 순간, 허전함과 추위는 낯설고 두려웠겠지만, 마침내 작은나무가 결심하고 잎을 떨구자 빈 가지 끝에서 새싹이 돋아납니다. 내려놓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지요. 그렇게 작은나무는 자라 큰 나무가 되어 친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


저 역시 작은나무와 비슷한 자리에 서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한두 권씩 모은 책들이 거실을 가득 메웠습니다. ‘정리해야지’ 마음은 먹었지만, 좀처럼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읽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품절되기 전에 사둬야 한다는 핑계로, 책을 놓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비효율적이고 대단한 집착이었지요.


그러다 연구실을 새로 마련하면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더 이상 읽지 않을 책은 팔고, 버릴 책은 버리기로. 손에서 책이 하나둘 떠나갈 때 마음이 허전했지만, 그 빈자리에 의외의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책상을 비우니 거실이 넓어지고, 그 자리에 아내의 작업실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붙잡고 있던 것을 내려놓자, 새로운 공간과 시간이 선물처럼 다가왔습니다. 작은나무가 잎을 떨구며 맞이한 마법 같은 순간이 제 삶에서도 일어난 셈이지요.


돌아보면 내려놓지 못한 것은 책이 아니라 변화를 두려워하는 제 마음이었습니다. 익숙함 속에 머물고 싶었던 마음, 애써 쥐고 있어야 안심이 되는 마음이 저를 붙들고 있었던 거지요.


지나치게 애쓰며 붙잡을 때, 삶은 흐름을 거슬러 흘러갑니다. 자연이 계절의 순환을 통해 들려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내려놓아야 새순이 돋고, 여백이 있어야 새로운 길이 열린다는 것.


윌콕스의 시가 말하는 가치 있는 사람은, 웃을 이유가 충분할 때가 아니라 모든 것이 흔들리는 순간에도 미소를 짓는 사람입니다. 그림책 속 작은나무처럼 두려움 속에서도 잎을 놓으며 성장의 길을 걷는 사람이지요.


저는 여전히 자주 망설이고, 쉽게 놓지 못하며, 버리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아까워합니다. 그러나 조금씩 손을 펴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비움이 곧 자유로움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의연하게 잎을 떨구는 일을 웃음으로 맞이할 때, 삶은 불현듯 새로운 풍경을 보여준다는 것을.


그렇게 시간과 결심이 차곡히 쌓이다 보면, 단단해지고, 한결 가벼워진 나를 만나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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