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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월 Apr 14. 2023

그림책이 선생이다

그림책으로 글쓰기


대학원에서 심신치유를 공부할 때였습니다. 게슈탈트 심리치료 과목이었는데, 매 수업마다 게슈탈트 기법 중 하나를 골라 발표하고 시연을 해야 했습니다. 제 차례가 되었을 때 저는 문학시연 기법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지요. 어떻게 발표를 준비할까 고민하다가 그림책을 읽어주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때 고른 그림책이 <노란 양동이>입니다.


이 책은 저에게 그림책의 세계로 성큼 발을 내딛도록 해준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내용은 누군가가 숲 속에 두고 간 노란 양동이와 주인공 새끼 여우가 일주일 동안 같이 지내면서 겪는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우는 일주일이라는 기한을 두고, 이때가 지나면 자신의 소유물로 삼기로 결정합니다. 그 사이, 새끼 여우는 매일같이 노란 양동이 찾아가 양동이로 꽃밭에 물도 주고 놀이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렇게 정해놓은 일주일이 되던 날. 자신의 양동이가 될 걸 철썩 같이 믿던 새끼 여우는 깜짝 놀랍니다. 양동이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겁니다. 놀란 친구들이 와서 위로하지만 서운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지요.


그러나 새끼 여우는 노란 양동이와 같이 했던 일주일의 시간과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며 괜찮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안타까워하는 친구들을 위로합니다. 울면서 떼를 써도 모자랄 판에 자신의 마음을 토닥이는 새끼 여우의 태도는 아, 하는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강의실에 모인 사람들을 술렁이게 만들었습니다.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행복하다고 믿는 소유론적 삶을 당연하게 여기는 상황에서, 노란 양동이와 함께 지내며 쌓았던 즐거움과 추억을 소중히 여기는 새끼 여우의 존재론적 삶으로의 의식 전환은 놀라움을 안겨주었던 것이지요.


그림책을 다 읽어주었을 때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양한 심리적 역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림책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겁니다. 그림책이 치유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한꺼번에 많은 사람의 눈물을 쏟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저 또한 놀란 입을 다물 수가 없었지요.  


이 날의 생생한 체험은 그림책의 치유적 기능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졌고, ‘지금-여기’의 인지적 통찰을 제공하는 마음챙김 명상과 그림책을 결합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림책명상 프로그램이 태어났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그림책을 읽고 명상을 하며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작업을 통해 과거의 상처와 화해하는 치유세션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재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고 있지요.


저는 치유작업을 하면서 그림책은 세 개의 나를 만나게 해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 개의 나란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입니다. 그림책을 읽으면 우리는 과거의 어린 시절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어떤 분은 행복한 과거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또 어떤 분들은 과거에 해결되지 못한 과제와 조우합니다. 이 과정에서 왜 자신이 지금껏 힘들게 살아왔는지를 어렴풋이 깨닫게 됩니다. 그림책에서 과거의 나에 이어 현재의 나를 만나게 되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아하, 하는 삶의 실마리를 푼 분들도 계십니다. 이 분들은 자각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힘을 얻습니다. 즉 미래의 나를 만나는 겁니다. 이렇게 그림책 한 권을 읽으며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를 만나는 과정 속에서 많은 분들이 치유를 경험합니다.


치유세션을 진행하면서 안타깝게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이제는 성인이 된 대부분의 어른들이 성장과정에서 온전히 어린 시절을 누리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후회와 자책, 회한을 갖고 살아갑니다.


어떤 참여자는 대가족의 맏이로 태어나, 바쁜 부모를 대신해 동생들을 키운 얘기를 하면서, 자신의 삶 따위는 없었다며 펑펑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림책을 보면서 어릴 적 힘겨웠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 것이지요.  


또 어떤 참여자는 남편을 일찍 떠나보내고 자녀들을 키우는 과정 속에서 남편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지나치게 애썼던 과거를 떠올리면서, 그림책을 읽고 나서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림책을 읽으면 자신의 과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거리두기를 통해 과거의 자신과 동일시하던 감정에서 벗어나게 되지요. 그러면서 자신의 이런저런 모습을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이며 당당해지고 단단해집니다. 자신의 과거가 새로운 삶을 여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이지요. 이때가 저에겐 가장 뿌듯한 시간입니다.

 

어른들이 왜 그림책을 읽어야 하느냐 묻는다면 그림책은 ‘본래의 자기’를 찾는데 더없이 좋은 텍스트라고 말합니다. 이를 통해 인생을 새롭게 자각하게 될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일종의 자신을 들여다보게끔 일깨우는 선생님을 만날 수 있지요. 그래서 제가 붙인 이름이 ‘그림책은 선생이다’입니다.  


가능하다면 어른들이 그림책을 자주 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림책은 불안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고통을 이해해 주고 위로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이 어떠했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게 도와줍니다.


또한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진정으로 나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줍니다. 성찰적 자각을 통해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게 해 주지요.


많은 분들이 그림책을 읽다가 치유되었다는 얘기를 합니다. 마음에 드는 그림책을 하나 정해 곁에 두고 자주 꺼내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그런 다음 뜻이 맞는 분들과 느낌을 공유해 보는  거죠. 그림책은 생각지 않게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디자인하도록 해주리라 믿습니다. 이게 바로 그림책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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