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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자수 Oct 29. 2022

함께 울 누군가가 필요했어요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웃으면서 달려 보자 푸른 들을

푸른 하늘 바라보며 노래하자

내 이름은 내 이름은 내 이름은 캔디     

나 혼자 있으면 어쩐지 쓸쓸해지지만

그럴 땐 얘기를 나누자 거울 속의 나하고

웃어라 웃어라 웃어라 캔디야

울면은 바보다 캔디 캔디야”     


어릴 때 좋아했던 만화 '캔디'의 주제가. 어린 시절 내 인생의 주제가라고 여길 만큼 이 노래를 좋아했다. 

‘그래! 절대 울지 말아야지. 울면 더 약해질 뿐이야.’

그렇게 이 노래 가사만 철석같이 믿고 살았는데...   

  

개뿔! 

외롭고 슬프면 울 수도 있지. 운다고 바보는 아니잖아. 고난과 역경이 닥쳐오더라도 주먹을 불끈 쥐는 만화영화 주인공도 아니고. 캔디를 닮겠다고 슬퍼도 눈물을 꾹 참은 시간이 억울할 지경이다.  

    

어릴 땐 울면 지는 것 같아서. 누구도 달래줄 사람이 없어서. 꾹 참았던 눈물이 아이러니하게 어른이 된 후 봇물처럼 자주 터져 나왔다. 눈물 총량의 법칙일까?

아빠를 새롭게 애도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이제는 슬픔의 감정을 만나도 스스로 잘 달래고 얼러줄 수 있는 어른이 되었고, 무엇보다 함께 울어줄 누군가를 만났기에 마음껏 울 수 있었다.      




매미가 매서울 정도로 울어대던 한 여름. 집단상담에 참여했다.  우리나라의 큰 산줄기인 백두대간을 잇는 경계답게 높고 높은 산자락 안에 위치한 문경. 빼곡한 나무숲 안의 리조트. 그곳에서 상담심리사를 꿈꾸는 이들과 집단상담의 장이 열렸다. 낯섦의 공기. 불안의 공기가 뜨거운 열기와 함께 쌕쌕거렸다. 

     

하나, 둘 마음을 담아 꺼낸 이야기에 모두가 숙연해지고 진중해지는 시간. 각자의 아픔과 어려움을 마주하고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여정을 함께 걷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나의 아픔을, 나의 치부를 꺼내놓는 일은 참 쉽지 않다. 혹여나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떻게 하지? 동정하면 어떻게 하지? 지지직거리는 마음의 주파수가 제 소리를 못 찾고 있었다.     


 언어의 조각들이 흩뿌려지길 기다리는 침묵. 이 침묵 가운데 내 마음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꺼내놓고 싶을까?’ 

 ‘내 삶의 핵심 주제는 무엇일까?’    

 '아이를 낳기 전, 나는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할까?'

 

시간이 지날수록 다정하고 따스한 온기가 흘렀다. 모두가 나처럼 마음 안에 생채기 하나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자 억지로 괜찮은 척 가장하고 있던 허세가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용기가 생겼다. 

 

아빠 이야기. 한 번도 ‘아빠’라 부를 수 없었던 이야기를 이들과 함께라면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내 곁에 없지만 과거에도, 지금도 내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아빠라는 존재. 그의 이야기를 많은 이들 앞에서 털어놓고 싶었다.     

 

“나는 아빠가 어릴 때 돌아가셨어요. 내가 한 살이 채 되기도 전에..... 때론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남들에게 다 있는 아빠가 나에겐 왜 없을까? 많이 원망하고 분노했어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아빠가.. 난 왜 늘 그립고 보고 싶었는지. 스쳐가는 바람 하나에도 나는 왜 이리 존재 자체가 흔들렸는지... 늘 곁에 누군가 있었기에 즐거웠고 행복했지만 마음은 외로웠어요......”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않는다면 길들여지지 않은 단단한 가죽이 내 마음을 평생 질기도록 가로막을 것 같았다. 이야기를 다 꺼낸 후,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어떤 얼굴로 어떤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지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때 집단원들은 하나, 둘 나를 안아주며 위로의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모두가 훌쩍훌쩍 눈물의 바닷속에서 함께 허우적거렸다. 

마지막으로 흰머리, 동글게 나온 배, 단단한 목소리의 울림이 있던 아빠 같은 집단 리더가 나를 꼭 안아주셨다.

 

“그동안 외로웠지? 아빠가 얼마나 그리웠니? 그래. 고생했다. 잘 컸다.”

“아빠! 아빠! 왜 나를 두고 먼저 떠났어요.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

처음으로 목놓아 아빠라고 울부짖었다. 한 번도 내뱉어보지 못한 단어가 처량하지만 힘 있게 울려 퍼졌다.

한없이 울부짖고 나서야 일평생 붙들고 있던 아빠의 잔상을... 이제는 놓아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기다렸던 그 품. 

나를 꼭 안아줄 수 있는 품. 

함께 울 수 있는 누군가의 품. 

그 따스한 품에서 나는 아빠를 떠나보냈다. 


긴긴밤을 홀로 울던 내가, 세상과 함께 슬퍼하고 울 수 있었던 이 경험은 상처 난 마음 도안에 어여쁜 자수를 놓는 경험이 되었다.

      

우리네 삶은 기쁨과 행복만이 아닌 슬픔과 절망의 순간이 비일비재하게 많다. 뜻하지 않게 마주한 날카로운 아픔은 결국 ‘나’에게서 없애야 할 것이 아닌, ‘나’에게 특별하고 근사한 하나뿐인 무늬를 남길 수 있다. 하지만 아픔이 어여쁜 자수가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누군가 함께 울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야 치유될 수 있다. 

   

당신에게는 따뜻한 온기가 존재하는가?

누군가의 아픔과 상처 앞에서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마음이 있는가? 

상처받은 이들에게 필요한 건 결국, 함께 껴안고 울어줄 수 있는 그 마음일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현존하고 있는 상황에서만 진실로 애도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존재 없이는 상실의 슬픔을 충분히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Bowlby,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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